지금 당장, 기후정의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공동대표

‘2050 탄소중립’ 선언, ‘탄소중립위원회(탄중위)’ 출범, ‘탄소중립기본법’ 제정. 그런데도 지난 토요일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의 외침이 손팻말을 타고 울려 퍼졌다. “지금 당장, 기후정의!” 기후 피해 당사자들은 배제, 대상화하고 기후 기득권층 중심으로 돌아가는 논의 구조, 사회 시스템 전환과 식량·보건·에너지 공공성 강화와 같은 근본 문제는 무시하고 탄소만 감축하겠다는 기술과 시장 위주의 접근에 대한 비판을 정부는 외면해왔다. 돌이켜보면 정부는 시민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게 되면 요구해온 그 무언가를 자기 의도대로 질러버리는 고약한 행태를 거듭해왔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공동대표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공동대표

우리나라에 기후위기에 관한 대책은 난무하지만 진솔한 사회적 반성은 없다. ‘우리 모두’가 오늘의 기후 현실에 책임이 있다 치고 대책부터 수립하는 건 순서가 틀렸다. 제대로 된 답도 나오지 않는다. 기후위기의 ‘차등적 책임’과 ‘생태적 빚’은 나라 사이만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도 있다. 2017년 기준 포스코가 우리나라 온실가스의 11.3%를 배출했고 배출량 상위 1% 업체가 50.8~53.3%, 상위 10% 업체가 87%가량을 배출했다. 이렇게 하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진다. 이걸 제쳐놓고 무얼 하겠다는 대책은 또 다른 ‘비즈니스’일 뿐이다.

이해관계가 워낙 달라서 탄중위에서 합의가 어렵다는 위원장의 말을 어느 인터뷰에서 들었다. 착각이다.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는 탄중위가 합의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고 최소한의 선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런데도 기후위기에 압도적 책임이 있는 쪽이 자숙은커녕 경제를 들먹이며 합의란 이름으로 자기 이익을 관철하려 든다. 사회적 반성 없이-아마도 의도적으로-‘판’부터 깐 게 문제다. 산업계 위원들은 자기들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진 ‘기후 빚’을 갚으라고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탄중위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다고? 그럼, 탄중위가 있을 이유가 없다. 기후위기 의제 공론화부터 탄소중립기본법까지 결국 시민들의 절박한 외침이 끌어낸 것이다.

기후위기는 사회를 돌보라는데
탄소중립 시나리오 지향은 기술
반성은 없고 숫자·계산만 난무
기술이 아무리 유용하다 해도
우리 운명 맡기는 것은 어리석다

지난 16일 발표된 ‘제6차 공항개발 종합계획’은 ‘특별법’으로 밀어붙였던 가덕도 신공항 개발을 확정했다. 흑산·백령·서산·울릉 공항과 새만금 신공항도 추진하고 지난 7월 환경부가 전략환경영향평가서를 반려했던 제주 제2공항 계획도 백지화되지 않았다. 지난해 2월 영국 법원은 런던 히스로공항 제3활주로 건설계획이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 감축 의무를 위반해서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지난 2월 프랑스는 기후변화 대응에 맞지 않는다며 파리 샤를드골공항 제4터미널 신축 계획을 폐기했고, 지난 5월에는 기차로 2시간30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의 항공기 운항 금지를 포함한 ‘기후와 복원 법안’을 통과시켰다. 저쪽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데, 이쪽은 무엇을 ‘할지’에 골몰한다. 특별법은 공항 건설 추진이 아니라 제1의 탄소 배출원인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중단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닌가. 우리 정부는 공항개발 계획을 세울 때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얼마나 심각히 고려했을까. 지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열심히 하면서 세우는 향후 30년의 탄소중립 계획은 어떤 것이며 얼마나 실현 가능할까.

기후위기를 초래한 지금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은 지난 8월 발표한 탄소중립 시나리오가 2050년 에너지 수요량을 2018년 대비 0.3~2.9% 감소로 전망한 데서도 나타난다. 그때도 에너지는-특히 산업부문은-지금처럼 써야겠다는 거다. 그래서 ‘무탄소 신전원’같이 실체도 모호하고 ‘지금은 없는’ 에너지로 에너지 전환을 하고, 그래도 계산에서 남는 수천만톤의 탄소는 ‘탄소포집·흡수·저장’이라는 ‘지금은 없는’ 기술로 처리하겠다는 무모함을 무릅쓴다. 시나리오에 반성과 고민은 보이질 않고 숫자와 계산만 난무한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만든 사회를 돌아보라는데 기술만 바라본다.

아무리 유용해도, 기술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어리석다. 지금은 없는 불확실한 기술인 까닭도 있지만, 사람이 아닌 기술이 탄소중립의 최종 해결사가 될 때 ‘정의로운 전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관심사는 사람이 아니라 효율이다. 기술주의가 득세하면 사람은 존중이 아닌 통제의 대상이 된다. 사회적 약자가 안전하게 설 자리는 없다. 기계를 경계하라던 장자의 가르침은 기술주의가 난무하는 오늘날 더 유효하다. 편리하다고 기계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효율만 생각하는 기심(機心)이 인심(人心)을 대체한다. 우리는 기계를 닮고, 우리가 개발한 기술에 종속된다. 우리는 점점 ‘사람’에서 멀어진다. 미래의 놀라운 신기술로 탄소중립을 이루었을 때 도래할 세상은 ‘멋진 신세계’를 닮지 않았을까. 두려워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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