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간역의 ‘인문학 향기’

최준영 책고집 대표

대전의 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강의한 뒤 경부선 기차에 올랐다. 구미도서관 강의를 위해서였다. 대전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영동역을 지나 황간역에 다다랐을 때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둠이 성큼 다가왔지만 아직은 덜 여문 상태여서 바깥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으려니 싶었다. 최근 몇 년은 주로 고속철도를 이용하느라 정겨운 간이역들을 놓쳐왔는데, 그날은 무궁화호를 탄 덕분에 황간역을 볼 수 있었다. 역사 외벽의 문구가 정겨웠다.

“기차는 앞으로 가는데 산은 뒤로만 가고/ 생각은 달려가는데 강물은 누워서 가고/ 마음은 날아가는데 기차는 자꾸 기어가고.”(정완영 시 ‘외갓집 가는 날’ 전문)

최준영 책고집 대표

최준영 책고집 대표

문득 황간역, 정확하게는 황간역 명예역장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철도고 동문 모임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그와 인연을 맺었다. 초로의 중년들이, 혹은 부부동반으로 혹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앉아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 온화한 표정과 소박한 몸짓이 어찌나 고맙던지 강의 말미에 나도 고마움을 표했다. “여러분 같은 형님 세대의 수고와 노력 덕분에 우리가 이나마 살게 된 겁니다.” 박수를 받으며 자리를 뜨는 중에 자신을 황간역 명예역장으로 소개하는 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만고만한 시골의 간이역에 불과했던 황간역이 음악과 미술, 그리고 인문학의 향기가 뚝뚝 묻어나는 문화와 예술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정년퇴임 후 황간역의 명예역장을 자임하며 역을 지키고 가꾼 그분의 수고와 노력 덕분이다. 그러한 사실은 뒤늦게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도 황간역에는 연중 관광객이 몰려든다. 어느덧 지역의 명소가 된 것이다.

대전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면서 황간역 명예역장과 다시 인연이 이어졌다. 4년째 대전의 노숙인 쉼터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처음엔 특강 한 번만 하기로 했는데, 반응이 좋았던지 한 번 더, 한 번 더 하게 되면서 어느새 4년째 하고 있다. 아직도 강사는 나 혼자다. 작년과 올해, 코로나19 탓에 퐁당퐁당 건너뛰긴 했지만 명맥을 잇고 있다.

한편 다행이고, 한편 안타깝다. 혼자서라도 강의할 수 있어 다행이고, 나 말고는 강의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 하긴 그렇다. 그리 적은 강사비에 대전까지 와줄 강사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강의 대상이 노숙인이라고 밝히면 대부분 손사래를 친다. 어쩌다 하게 된다 한들 노숙인의 처지와 실존적 고뇌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강의를 하는 이는 드물 수밖에 없다.

고심 끝에 서울의 성프란시스대학(최초의 노숙인 인문학 강좌, 2005년 9월 첫 강의를 내가 했다)처럼 대전에서도 지속 가능한 인문학 강좌를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든 일이 그렇듯, 문제는 운영비다. 아니다. 돈 이전에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 다행히 몇몇 분을 만났지만 역부족이다. 바로 그때 황간역 명예역장이 도와주셨다. 대전역에 근무할 때 인연을 맺은 분이 대전의 대표적 기업인으로 성장했다면서 그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애써주신 역장님의 그 마음은 잊을 수 없다.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얼핏 돈이 필요한 일로 보이지만 정작은 사람의 마음이 모여야 한다. 얼핏 강의할 공간 마련이 먼저일 것 같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건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일에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나눠줄 사람이다. 결국 사람이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모이고, 또 모이면 일은 되게 되어 있다.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일이다.

어느새 기차가 구미역에 다다랐다. 역사를 빠져나올 무렵 밤하늘에 황간역 입간판의 글귀가 아로새겨졌다. 추석 언저리여서 그런지 달이 밝아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음은 날아가는데 현실은 자꾸 기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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