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신뢰 좀먹는 정치

박진웅 IT 노동자

최근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콘텐츠인 만큼 한국에서도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다. 그러나 필자는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뜨끔거렸다.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비겁한 등장인물들에게 몰입하면서도,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을 그린 드라마 안에서 그들이 어렵게 선택하는 것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들과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박진웅 IT 노동자

박진웅 IT 노동자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과거 저신뢰사회라 표현한 한국에 대한 판단을 바꾸고 신뢰가 높은 사회라고 평했다. 혹자는 한국의 신뢰는 사적 신뢰와 공적 신뢰로 나눠지며 사적 신뢰는 높고 공적 신뢰는 낮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의 공통점은 한국사회의 시민들이 기본적인 도덕, 예의, 법규, 제도와 같은 높은 수준의 사회적 규범을 적극적으로 지키려 하는 편이라는 부분에 집중한다.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 규범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신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적 영역에서의 신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만큼이나 공동체와 이웃에 대해 함께 살아간다는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나의 안전만큼이나 타인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깊게 이해하는 모습은 높은 백신 접종률과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로 드러난다. 자신의 위치와 동선이라는 고유한 개인정보의 침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무척이나 성숙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적 영역의 신뢰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우리가 촛불혁명으로 일궈낸 정권은 기대와 다른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내며 시민들을 배신했다. 공정과 정의, 평등에 대한 요구로 세워진 정부가 여야를 막론하고 각종 논란, 특혜, 비리, 정책실패와 관련된 이슈 논란에 매일같이 휩싸였다. 심지어 논란을 일으킨 이들이 잘못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면피하려는 모습은 그토록 바뀌길 바랐던 구태정치 그 자체였다.

정치만이 아니다. 길어진 코로나19로 인해 의료진은 지쳐 쓰러져가고 의료시스템은 붕괴 직전이다. 정책의 실패로 도시에 집을 구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수많은 자영업자들과 직장인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세대 갈등과 성별 갈등은 날로 커지고 있으며, 난민과 약자, 외국에 대한 혐오감정도 커지고 있다. 당연했던 사적 신뢰조차도 얼마든지 위태로워질 만큼 우리 사회는 짙게 멍들어가고 있다.

왜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끊임없이 시민들의 신뢰를 농락하며 게임의 룰을 바꾸고 불공정과 부정의로 느껴지는 일들이 반복되는 현실 때문은 아닐까? 각자도생과 승자독식의 잔혹함에도 그나마 기계적 평등함이라도 누리며 도전할 수 있다는, 공정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최소한의 조건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당연히 우리의 현실이 총탄과 폭력으로 이뤄진 드라마보다는 더 살기 좋겠지만,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대가와 규칙이 정직하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오랜 시간 느껴온 공적 영역에 대한 회의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신뢰사회는 대가를 요구한다. 이제까지는 공적 영역에서 잃어버린 신뢰를 사적 영역으로 메웠다. 민주화 운동이, 금융위기 극복이, 촛불혁명이, 그리고 코로나19와 맞서는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뢰는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에너지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을까? 사적 영역의 신뢰마저 곧 무너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더 큰 대가를 치르기 전에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희망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변화를 시도해야 하겠지만, 또다시 시민들의 고통과 희생에 기대나 싶은 생각에 무력감이 든다. 대체 언제까지 정치는 시민들의 신뢰를 먹이로 삼을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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