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가 답할 때다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대마불사(大馬不死)란 단어가 있다. 말들이 한데 모여 큰 무리를 이루면 맹수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둑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여러 개의 바둑점으로 이어져 있으면 여간해서 죽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올 초부터 대마불사가 맞는지를 확인할 만한 사안이 발생했다. 서울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의 부도 위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9000억원의 기업어음(CP)을 발행했지만, 공사대금과 빌린 기금 등을 갚고 나면 운영 자금이 부족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오는 12월15일까지 갚아야 할 기업어음이 7200억원에 달한다는 소식과 함께 최근 다시 부도 위기가 불거졌다. 서울교통공사는 공사채 추가 발행을 준비 중이다. 장기부채(공사채)로 단기부채(기업어음)을 급하게 막는 식이다.

서울교통공사가 만약 공사채 발행에 ‘성공’하더라도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공사채 발행 규모가 130%에 달해 내년부터는 지방공기업 예산편성기준에 따라 공사채 발행이 아예 불가능하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해 1조1137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올해는 1조7000억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2년 적자액이 3조원 가까이 되는 규모다. 재정난의 원인을 살펴봤다. 4가지다. 무임승차, 6년째 묶여 있는 지하철 요금, 코로나19로 인한 승객·운임수입 감소, 통합에 따른 경영 위기 가속 등이다. 무임승차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코로나19 이전을 기준으로 지하철 적자의 60%가량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무임승차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찾아봤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이 법적 근거도 없이 ‘65세 이상 노인’에 대해 시혜를 베푼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정부는 국가유공자(1985년), 장애인(1991년), 독립유공자(1995년), 5·18유공자(2002년), 특수임무유공자(2005년) 등도 무임승차 대상에 포함했다. 그러나 비용 분담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뒷전이었다. 생색은 정부가 내고 뒷감당은 지방자치단체와 산하 도시철도공사가 떠맡는 구조다.

지난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는 정부가 무임승차 비용 일부를 보전하는 내용의 도시철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심사소위의 의결은 전국 6개 도시철도공사의 고질적 재정난을 해결할 획기적 실마리였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리 전개됐다.

2020년 11월19일 국회 국토위 회의록(34~39쪽)에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날 회의는 국토위 소속의 한 국회의원이 “도시철도법(개정안)에 대해 기획재정부에서 의견이 있다고 진술할 기회를 달라고 들었다”는 발언으로 시작된다. 기다렸다는 듯이 안일환 기재부 2차관이 “(도시철도) 건설은 정부가 지원을 하되 운영은 지자체 책임이 원칙”이라며 “지자체별로 무임승차 비용 등 운영 경비를 부담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안 차관은 “지금 무임승차 연령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 100% 감면이 적정한지, 소득을 따지지 않고 동일한 혜택을 드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논의를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다.

법안심사소위에 참가했던 일부 국회의원들이 “아니, 어저께 소위원회에서 제대로 다 한 건데 여기 와서 뒤집으면 어떡해요” “오늘 이 자리에서 표결할 것을 요구한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국토위 회의는 “재정당국이 저렇게까지 나오니 오늘 의결하기로 한 것은 한 번만 더 보류하되 다음 위원회 때에는 의결하자”는 쪽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11개월이 지났다. 나라의 곳간을 쥐락펴락하는 기재부나 관련법 개정 권한을 가진 국토위 소속 국회의원들은 그동안 무임승차 해결책 논의를 회피했다. 기재부는 국회의원 등이 참가한 토론회 참석조차 거부했다. 재정난의 1차 피해자는 밤을 새워가며 정비하고 새벽부터 전동차를 운행함에도 급여가 동결된 노동자들이다. 앞으로 서울시민들이 낸 세금을 한꺼번에 쏟아부어야 할 수도 있다. 실제 부도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용객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냉난방기가 작동하지 않는 지하철을 타야 할지도 모른다.

지하철이 운행되는 전국 6개 광역자치단체장과 산하 도시철도공사 사장들이 해결책 마련을 호소하는 탄원서까지 준비 중이다. 정치권과 기재부가 외면하는 사이에 서울교통공사는 부도라는 종착역을 향해 내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 설마 하는 사이 ‘대마불사’가 아니라 ‘대마횡사(大馬橫死)’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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