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왜 반성하지 않나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지난해 코로나19 탓에 124년 만에 처음으로 취소됐던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지난 12일 개최됐다. 이날 대회 현장에선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1966년 여성 최초로 보스턴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로버타 기브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됐다.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1960년대는 대회 주최 측이 여성을 생리학적으로 무능하다고 간주하고 여성의 대회 참가를 불허하던 시절이었다. 기브는 대회 관계자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덤불 뒤에 숨어 있다가 경주가 시작되자 코스로 뛰어들었다. 오빠의 운동화를 빌려 신은 기브는 발의 통증이 심한데도 끝까지 달려 결승선을 통과했다. 역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55년의 세월이 흐른 2021년 일본에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따르면 도쿄 올림픽 출전 선수 중 여성의 비율은 48.5%로, 1896년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남녀 성비가 1 대 1에 근접했다.

덤불 뒤에 숨어 있어야 했던 여성들은 이제 올림픽 개회식에서 당당하게 행진하고, 메달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있다. 한국의 여성 선수들도 도쿄 올림픽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양궁대표팀 안산이 사상 최초로 금메달 3개를 쓸어담았고, 배구대표팀 김연경은 세계 강호들에게 뒤지지 않는 경기력을 선보이며 4강 진출을 이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선수들은 여전히 무대 뒤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세계 여자체조를 제패했던 시몬 바일스(미국)는 지난달 미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자신이 과거 체조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증언하며, 나사르의 혐의를 모르쇠했던 연방수사국(FBI)과 미국 체조계를 비판했다. 나사르는 징역 30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나, 선수들이 입은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2019년 쇼트트랙 대표팀 심석희가 17세 때부터 조재범 당시 대표팀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어렵게 용기를 낸 심석희에게 격려와 응원이 쏟아졌다.

최근 심석희의 이름이 다시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 전 코치 측이 항소심 법원에 제출한 ‘변호인 의견서’의 내용이 한 매체에 보도되면서다. 보도에 따르면 심석희는 A코치와 주고받은 사적인 모바일 메시지에서 대표팀 동료들을 비난했다. 심석희가 경기 중 고의충돌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도 있었다.

이런 내용이 조 전 코치 측에서 흘러나왔다면 의도는 뻔하다. 심석희에게 흠집을 내고 자신의 형량을 낮추겠다는 시도로 보인다. 반성해야 할 사람이 되레 피해자에 대한 역습을 준비했다. 하지만 동료를 뒤에서 욕하는 것은 전 세계 모든 조직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일이고, 고의충돌 여부는 조사해서 밝혀내면 된다. 심석희가 동료들을 욕했다고 해서 그것이 조 전 코치의 범죄를 가볍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 전 코치 측에 동조하는 여론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이번 사건이 심석희의 용기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여성들을 폄훼하는 여론으로 발전되지 않기를 바란다. 다행히도 법원은 조 전 코치 측이 제출한 의견서에 흔들리지 않았다. 법원은 1심에서 징역 10년6개월이던 조 전 코치의 형량을 2심에서 13년으로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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