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속의 기념비읽음

이진경
[이진경의 생각의 그늘]그늘 속의 기념비

기념비,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잊지 말자며 세우는 조형물을 뜻한다. 어떤 것은 소중하기에, 드물고 고귀하기에 ‘잊지 말자’며 세워지고, 어떤 것은 끔찍하기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잊지 말자’며 세워진다. 그러나 기념비는 단지 비석이나 조각 같은 조형물만을 뜻하진 않는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조형물이 없다 해도 잊을 수 없는 기념비라 하기에 충분하다. ‘6·25’도, ‘4·3’도, ‘10·26’도, ‘5·17’도 그저 숫자만으로 충분히 기념비가 된다. 때로 사람들은 전두환이나 박정희의 기념물에 달려들어 부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기념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이름 석 자면 기념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방정식’ ‘괴델의 정리’ 같은 말에 새겨진 이름은 강철로 세운 독재자의 기념물이 닳아 없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다.

[이진경의 생각의 그늘]그늘 속의 기념비

사실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최소한 두 번째 사건이다. ‘그날’ 발생한 사건, ‘그런 일’을 하거나 ‘그런 삶’을 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첫 번째 사건이기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5·18’이나 ‘노회찬’ 같은 이름을 다른 이들의 눈과 귀, 머리 속에 새기는 일은 언제나 그다음에 오는 반복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은 결코 첫 번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첫 번째 사건에 의미나 해석이라는 형상과 색깔이 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념비는 불화와 대결 속에서 세워지기 십상이다. 애초의 사건을 ‘어떤 사건’으로 기억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광주사태’라고 불리던 어떤 사건을 ‘내란’이나 ‘폭동’이 아니라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말로 기억되게 된 것은 10년 가까이 길거리에서 돌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격한 대결을 통해서였다.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싸늘한 경멸의 시선을 감수해야 하던 것에서 경의 어린 시선을 받는 사건으로 바뀐 것 또한 20년 이상을 매주 집회를 하며 끈질지게 지속해온 투쟁의 결과였다. 오랜 망각 속에서 깨어나 수립된 기념비, 혹은 이미 알려진 것과 완전히 다른 형상과 색깔을 갖게 된 기념비는 모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삶을 걸고’ 지속했던 이 투쟁의 산물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니, 애써 붙잡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라고도 하건만, 왜 우리는 지나간 사건이나 인물을 두고 인생마저 걸고서 싸우고 대결하는 것일까? 그것은 기념비가 과거 아닌 미래를 향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기념비는 다수의 타인들을 향해 세워진다. 기념비란 일종의 자석이다. 사람들을 당기는 자석, 기념비에 새겨진 미래로 대중을 당기는 자석이다.

수치의 기념비는 그늘 속에 세워져

‘노무현’이나 ‘노회찬’이라는, 이미 죽고 없는 인물을 기념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삶을 많은 이들이 이후에 반복했으면 하는 소망의 표현이다. ‘5·18’이나 ‘위안부’ 같은 기념비를 둘러싼 불화와 대결은 그것을 알거나 알게 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들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역사란 어쩌면 어떤 기념비를 세울 것인지, 어떤 형상과 색깔로 세울 것인지를 다투는 투쟁의 장 아닐까?

국가나 자본, 혹은 권력이 세우는 기념비에는 모두 강한 조명이 사용된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성공과 명예의 신화를 위해 세워지는 기념비 또한 그렇다. 사건의 그림자를 지우는 강한 조명은 얼굴의 찌든 때를 지우는 짙은 분장과 짝을 이룬다. 사실 우리가 아는 영웅적 인물들 가운데 과장과 분장 없는 인물은 찾기 힘들다. 대중을 계몽하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할수록 조명이나 분장은 강해진다. 계도하려는 대중의 규모가 클수록 분장과 과장의 정도도 심해진다. 언제나 ‘국민’ 전체를 계도하려는 국가권력의 기념비는 그 분장과 과장이 사실이나 사건을 등지기도 한다. ‘5·16’이나 ‘5·17’에 새겨진 ‘구국의 결단’이 그랬고,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에 칠해진 붉은색이 그랬으며, ‘광주사태’에 끼워넣은 ‘북한 공작원’이 그랬음을 우리는 안다.

성공과 명예의 거대한 기념비 반대편에는 기념은커녕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건이나 인물이 있다. 성공과 명예를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들, 강한 조명이 만드는 짙은 그늘로 인해 망각의 신 제단에 바쳐지는 것들이 있다. 가령 부끄러움이나 수치의 기념비, 안타까움과 슬픔의 기념비는 대개 그런 그늘 속에 세워진다.

내가 경험했던 부끄러움과 수치심,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인해
세우고 싶은 기념비가 하나 있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노래하고 카메라를 들었으나,
끝내 추방당했던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미누’라는 인물의 기념비.
그늘의 어둠 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그렇기에 나만의 기념비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념비로, 미래의 기념비로 만들고 싶다.

내게는 눈에 잘 보이게 만들 조명을 동원할 능력이 없더라도, 어둠의 그늘 속에라도 세우고 싶은 기념비들이 있다. 필경 반복될 사건들을 함축하고 있기에, 내가 사는 세상의 미래를 위해서 세우고 싶은 기념비들이 있었다. 특히 내가 경험했던 부끄러움과 수치심,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인해 어떻게든 세우고 싶은 기념비가 하나 있었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한국에서 살았으며, 자신 같은 처지의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추방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대에서 노래하고 카메라를 들었으나, 끝내 추방당했던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미누’라는 인물의 기념비.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록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보컬이었고, 이주노동자방송국의 활동가였다. 1980년대 말 이른바 ‘3D 업종’에서 일할 사람들이 사라지자 ‘연수생’이라는 기형적 형식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려는 흐름을 타고 한국에 왔다. 외국인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한 인연으로, ‘산업연수생제도’를 폐지하라며 농성하던 명동성당에서 록밴드를 결성해 보컬을 맡게 된다. 이후 그는 이주노동자방송국에 참여해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필름에 담고 뉴스를 만들게 되었는데, 내가 참여하던 지식공동체가 그들과 사무실을 나누어 쓰게 되면서 그와 만나게 되었다.

‘안녕, 미누’ 상영 다섯 달 후 죽은 그

미누가 보컬로 활동했던 록밴드 ‘스탑크랙다운’의 6주년 기념공연.

미누가 보컬로 활동했던 록밴드 ‘스탑크랙다운’의 6주년 기념공연.

평생 잊지 못할 곤혹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2008년 12월 송년회에서였다. 그해 그가 속한 밴드는 2집 앨범을 냈고, 그중 ‘베트남 아가씨’란 노래가 좋았던 나는 술자리에서 흔히 하듯 그 노래를 청했다. 몇 번을 빼던 그가 드디어 일어서서 노래를 하는데, 정작 그가 한 노래는 박노해의 시로 만든 ‘손무덤’이란 노래였다. 집회나 무대에서 노래할 때면 항상 빨간 칠을 한 목장갑을 끼고 부르던 노래였다. 일을 하다 프레스에 잘려나간 동료의 손목을 들고 가 소주에 씻어 손무덤을 만들어주고 왔다는, 1980년대 한국 노동자의 현실을 담은 노래다.

청한 곡이 아니라 약간 실망해서였을까? 노래가 끝난 뒤 나는 솔직히 프레스에 손목이 잘려나가는 건 2008년 한국에선 현실감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한다. 1년 전 마석 가구공단에 취재하러 갔을 때 어떤 네팔 친구를 만났는데, 오른팔이 없었다고. 어쩌다 그랬냐고 하니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옷깃이 물려 들어가 팔이 잘려나갔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당황하고 난감했던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말하는 그도, 듣는 나도 그저 울고만 있었다.

내 느낌대로 한국의 노동자가 ‘손무덤’으로부터 멀어진 게 사실이라면, 그건 그 네팔인 같은 이주노동자들이 그런 일들을 대신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노동자나 민중이란 말 인근에서 살려 했고, 이주노동자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안타까움과 슬픔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극도로 곤혹스러운 감응은 더더욱 강렬했다. 이게 그들 이주민이 사는 현실이고 동시에 나 같은 한국인들이 사는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2009년, 그는 이명박 정부의 표적단속에 걸려 ‘보호소’에 수용되었고, 끝내 추방되어 버렸다. 그때 나는 연구년으로 일본에 가 있었기에 ‘저지 투쟁’은커녕 면회도 한 번 가지 못했다. 도쿄의 방구석에서 다시 한 번 미안함과 부끄러움의 홍수에 잠겨야 했다. 그런데 한국과 무슨 전생의 질긴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는 소식이 왔다. 2018년 DMZ영화제에서 <안녕, 미누>라는 영화가 상영되면서, 그걸 계기로 초대되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초대는 누구보다 나를 위한 것 같았다. 며칠 뒤 그는 돌아갔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그런데, 그런데 그로부터 다섯 달 뒤, 미누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 겨울엔 네팔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미누’라는 말은 내게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사건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누만이 아니라 어쩌면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들어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의 집합이며, 그런 삶을 바꾸겠다고 자기 삶의 행로를 바꾼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건이다. 그늘의 어둠 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그렇기에 나로선 그 이름을 기념비로 만들고 싶었다. 나만의 기념비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념비로, 미래의 기념비로. 그런데 이런 소망이 그저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20년, 이주노동자의 인권 향상을 위해 활동한 분들을 대상으로 ‘미누상’을 제정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 얘기를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그리고 2020년 11월, 이주노조 활동가이기도 한 영화감독 섹 알 마문이 첫 번째 미누상을 받았다. 올해 11월, 두 번째 수상자가 선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념비에 다가올 대중을 기다리고 있다.

■이진경

본명은 박태호. 사회학을 전공했으나 철학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잡학’을 하고 있다.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이고, ‘수유너머’란 이름의 지식공동체를 몇 번이나 바꾸어가며 계속하고 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노마디즘>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파격의 고전>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삶을 위한 철학 수업>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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