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부 할아버지’ 별의 순간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어쩌다 ‘그 집’ 치킨을 먹으면서도 깐부의 뜻은 몰랐다. 어감상 일본어가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그뿐, 굳이 그 의미를 헤아려보지 않고 지나쳤다. 그런데 이게 아이들 놀이에서 한패가 된 짝꿍을 뜻하는 은어(隱語)라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구슬치기 장면. 극중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에게 마지막 남은 한 개의 구슬을 건네주며 1번 참가자 오일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깐부잖어. 깐부끼린 니꺼 내꺼가 없는 거야.” 깐부의 경우처럼 사소한 것이라도 새로 알게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연극이란 놀이를 상정하면, 오일남 역의 배우 오영수는 나의 ‘깐부’다. 작금 <오징어 게임>으로 일약 월드 스타가 된 대배우에게 농을 걸려는 수작이 아니다. 아직은 나에게 일생의 유일한 출연작으로 남아 있지만, 오영수는 제대로 만든 대학로 어느 연극 무대에 함께 선 엄연한 동료 배우다. 꽤 오래전 연극 기자일 때 있었던 일화이다. 개성 있는 배우 김성녀·양금석·윤여성 등도 함께한 무대였다.

복마전 같은 대장동 이슈를 걷어내면, 요즘 세간의 화제는 단연 <오징어 게임>이 아닐까 한다. 무릇 이 드라마에 대한 세간의 호평은 이미 한국을 넘어 말 그대로 ‘세계의 사이’로 번지고 있다. 그 세평의 중심에 오일남 역의 오영수가 있다. 그는 극의 대단원에서 사람 목숨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무지막지한 데스 게임의 설계자로 드러난다. 연약한 노인의 반전에 한 방 먹힌 충격, 그게 이 드라마의 매력이자 오영수의 마력이지 싶다.

지난 추석연휴에 <오징어 게임>을 정주행 하면서 나는 오영수에게 ‘별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드라마 속 참가자의 연령대나 부여된 역할로 볼 때, 그는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였다. 아, 드디어 때가 왔구나! 그간 설움이라면 설움이었을 ‘무명씨’를 벗어나는 인생의 반전이 여기 있겠구나 싶었다. 비록 본업인 연극이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 이렇게 뜬 걸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오영수는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배우다. 그런 평가는 <오징어 게임>의 성공과는 전혀 무관하다. 연극배우 인생 54년, 200여편의 출연작이 관록 증명서이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주연보다 대개는 오일남처럼 묵직한 조연이었고 그게 제격인 배우였다. 세평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항상심으로 용맹정진하며 연극의 진리를 찾는 ‘구도자형 배우’라고 할까. 삭발이 잘 어울리는 외모 덕에 수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스님’ 역으로 돋보였다지만, 구도자적인 내면의 본바탕이 그런 캐릭터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장구한 연기 인생에서 <오징어 게임>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축하 인사 겸 전화를 했다. 오영수의 감정은 예상한 대로 결코 기준선을 넘는 법 없이 너무 차분해서 외려 묻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잘될 줄은 알았지만….” 그의 연기 인생 중 절반 이상의 세월을 지켜본 관찰자로서 판단하건대, 그에게 지금은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다.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이처럼 화제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던가. 그것도 인생의 황혼 무렵에 다다른 나이 일흔일곱에 말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적인 순간,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 오려면 억겁의 기간이 태평히 흘러가게 마련이다”(<광기와 우연의 역사>)라고 했다. 한 명의 천재가 나오려면 수많은 범인(凡人)이 태어나야 한다. 한 개인의 역사도 이와 같아서, 평범한 일상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도 평생 단 한 번 별의 순간을 맞이할까 말까 한다. 그만큼 드물고 귀한 일이다. 오랜 세월을 인내하면서 “신사적인 풍모”(윤여성)로 분수를 지키며 연기를 벼리고 벼린 오영수에게는 바로 지금, 그 순간이 찾아왔다. 감사하고 축복할 일이다.

1990년대 초 국립극단 소속으로 전성기일 때, 오영수가 ‘국전’ 역으로 출연한 연극 <피고지고 피고지고>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떵떵거리며 살았든 죽을 쑤며 살았든 똑같은 거야. 그저 피고지고 피고지고 하는 거야. 이쪽저쪽 옮겨 다니면서….” 이런 달관한 태도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그해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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