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2차 가해’ 무기 쥐여 주는 언론들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은 잘 만들어진 보도 가이드라인이다. 미투 운동 상황에서 언론이 우리 사회의 성차별 구조를 인식하면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윤리적으로 보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성폭력 사건 보도에서 해당 가이드라인을 준수할 것을 당부하는 목소리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보도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어 가이드라인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에 대한 고민이 커지는 상황이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

최근의 성폭력 사건 관련 보도에서 비판되고 있는 문제점은 가이드라인에서 언론이 해서는 안 될 보도 행태로 명시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미성년자 괴롭힌 ‘박사방’ 조주빈”과 같은 헤드라인은 “가해행위를 미화하거나 모호하게 표현하여 가해자의 책임이 가볍게 인식되게 하거나 가해행위의 심각성을 희석하는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항목을 지키지 않은 나쁜 사례로 교과서에 제시해도 될 것 같다. 사건에 대한 법적 판결이 내려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왜 가해행위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표현을 사용하는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심석희 선수에 대한 보도 행태 역시 성폭력 사건과 관계없는 사적 생활을 보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항목에 위배되는 일이다. 해당 정보가 유포되었던 맥락과 그 효과를 보면 결국 가해자의 말을 통해 의제가 설정되고 세상을 가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범주화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왜 이런 보도를 하면 안 되는지가 피해자의 피해가 가중되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 당시 현장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기자들은 가이드라인에 대한 인식 제고를 중요한 대안으로 꼽았다. 인식 제고라는 말에는 가이드라인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넘어 왜 이것이 문제인지를 아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의 의미는, 어떤 언론사나 기자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어떤 표현이 2차 피해 유발 표현인지 분별하고 어떤 내용은 보도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휘트니 필립스는 <미디어는 어떻게 허위정보에 속았는가>에서 기자는 뉴스 소비자가 해당 뉴스를 통해 타인에게 해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보도가 수용자에게 무기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미디어 수용자가 최종 악당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는 언론 보도 자체가 미치는 해악은 물론, 그 보도가 이후에 어떻게 사용될지에 대한 고려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뉴스 이용자는 적극적으로 뉴스를 유포하고 재창조하는 주체이다. 악의가 없어도 유포하는 능동성 그 자체가 무기가 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유포되는 자료를 제공하는 기자들의 판단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성폭력 사건과 관계없는 사적 생활을 보도하는 언론 기사는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서 유통되면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의심을 부추기고 더 나아가 성폭력이 어떤 문제인지를 우리 사회가 인식하는 것을 막는 데 쓰일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어 주는 셈이다.

가이드라인을 인식하는 것은 성폭력 보도에서 언론을 통한 2차 피해가 어떻게 그리고 왜 발생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성폭력은 범죄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비난을 받는 범죄였다.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데 무고죄를 강화하자는 주장이 먼저 나오는 상황에서, 언론 보도가 수용자의 반응과 아울러 사회에 어떤 해악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지를, 어떻게 언론보도가 타인을 해하는 무기를 만들어주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가이드라인에 대한 인식 제고의 의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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