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시간

고영직 문학평론가

60+ 노년 세대가 출간한 일기를 읽는다. 2018년에 출간된 1922년생 이옥남의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에 이어, 지난봄 ‘촌놈일기’를 표방하는 1954년생 베이비부머 이종옥의 일기 <몽당연필은 아직 심심해>를 읽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일기 외에도 60+ 노년 세대가 쓰는 비공식적 일기, 자서전 같은 기록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60+ 당사자들이 쓰는 노년 문학의 시대가 도래한 걸까.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이옥남의 일기는 순전히 내 멋대로 선정한 2018년 올해의 책이었다.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열일곱에 시집온 양양 송천마을에 살고 있는 이옥남의 일기는 1987년부터 30년 동안 써온 ‘농사일기’이지만 단순한 농사일기가 아니다. 배운 먹물들이 쓰는 관념투성이 말이 아니라 생생한 입말로 나이듦을 성찰하는 뛰어난 기록문학이다. 이옥남의 일기에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겸손한 농(農)적 순환의 삶이 있고, 인간의 인간됨을 끝없이 자문자답하는 담백한 언어의 향기가 가득하다. 어두워지는 눈을 비비며 권정생의 <몽실언니>와 <한티재하늘>을 읽은 후, 등장인물들의 기구한 운명을 아파하며 밤새 베갯잇을 적시는 모습도 선하다. 100세 노인 이옥남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능력은 놀랄 정도로 억센 것”이라는 수전 손태그의 말을 절로 연상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인문학과 만나고, 예술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더 구체적이고, 더 실감 있게 느낄 수 있는 ‘세계감(世界感)’의 역량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김성우와 사회학자 엄기호는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역량은 내 몸에 쌓이는 힘이고, 그 핵심은 유연함”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그러면서 읽고 쓰는 리터러시 능력을 강조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 역을 맡은 70대 오영수 배우가 한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아름다움’이라고 한 데에 시청자들이 잔잔한 감동을 받은 것도 나이듦의 내공을 엿봤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50+ 신중년과 60+ 신노년 세대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능력은 갈수록 희귀한 현상으로 치부되고 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속 노인 캐릭터는 현실에서 종말을 고한 걸까. 50+ 세대 이상의 여가시간을 온통 유튜브 시청이 차지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50+ 세대의 유튜브 이용자 수와 시청시간이 급증한 점이 눈에 띈다. 한 통계에 따르면, 가장 유튜브를 많이 시청하는 50+ 세대의 1인당 월평균 시청시간은 922분으로 조사됐다.

전 생애 평생학습이 강조되는 시절, 50+ 세대를 대상으로 읽고 쓰며 리터러시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정책사업이 필요하다. 50+ 세대를 위한 정책사업은 그동안 경제 활동과 사회공헌 활동을 비롯해 지나치게 ‘활동적 삶’을 권장하는 사업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삶은 활동적 삶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활동적 삶과 ‘사색적 삶’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 50+ 세대에게도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옥남과 이종옥의 일기를 보며, 나를 위한 시간을 생각한다. 나를 위한 ‘고독’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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