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의 소리를 들어라읽음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하승우의 풀뿌리]변경의 소리를 들어라

넷플릭스 영화 <킹덤> 시리즈에서 좀비가 처음 발생한 지역은 함경도의 국경이다. 중앙의 권력다툼에서 잠시 밀려난 이들이 행세하는 완충지대이자 외부의 위협이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경계.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그런 변경의 사람들에게 중앙의 권력은 욕망의 대상이자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이다. 그곳을 벗어나려면 권력이 필요한데, 살고자 충성을 바쳐도 중앙의 필요에 따라 변경의 사람들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저희도 언제쯤 관직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묻던 변경인은 버림받아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몸이 된다. 현실에서는 언제쯤이면 농정(農政)이 실현될지 기다리던 열외국민 농민들이,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같은 일을 해도 적은 임금을 받는 지방의 노동자들이 그렇게 살아 있다. 살아남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중앙의 대장동이나 신도시 이야기는 분노보다 열패감을 자극한다.

예전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변경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지친 열패감은 저항의 의지도 꺾는다. 무작정 중앙으로 떠나면 삶이 좀 나아질까 싶지만 그 길에는 이미 거대한 성벽이 세워져 있다. 모아놓은 자산과 자신을 증명할 연고·능력주의, 이 둘이 없으면 성문을 통과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변경의 정서는 저항보다 우리가 망하면 너희라고 무사할 것 같냐는 악다구니에 가깝다.

이쯤 되면 좀비들이 한양으로 가는 관문인 문경새재로 들이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변경의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 중앙으로 달려갈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는 굶주림보다 돈맛이 더 강한 욕망이라 사람 잡아먹는 좀비의 출현지는 변경이 아니라 중앙이다.

최근 몇 년간 여러 지방을 돌다보면 여기 부동산 가격은 왜 이렇게 올랐어요, 묻게 된다. 그러면 주로 듣는 대답은 얼마 전 서울에서 관광버스 몇 대가 와서 매물을 싹 걷어갔어요, 라는 말이다. 지방의 중소형 아파트들조차 재테크의 수단으로 변했고, 그나마 주거비용이 적어서 살았는데 이제는 그조차 어려워져 떠나는 이들이 늘어난다. 자연스러운 인구 감소, 예정된 지방 소멸은 없다.

신기한 일은 지방의 인구가 줄어드는데 폐기물처리장의 규모는 커진다는 점이다. 왜일까? 2025년이면 수도권의 쓰레기매립지가 꽉 차는 것과 연관은 없을까? 땅값이 비싸 매립지를 찾을 수 없게 된 수도권은 자신들의 쓰레기를 변경에 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상품이 된 쓰레기는 기업들에는 이득을, 변경의 사람들에게는 또 절망을 새길 것이다.

영화와 반대로 현실에서는 힘 있는 자들이 좀비처럼 가난한 이들의 삶을 위협한다. 이 혼란 속에 이족(異族)의 침입도 시작됐다. 정부가 방관하는 사이에 맥쿼리와 같은 초국적 투자회사나 글랜우드PE 같은 사모투자펀드들이 야금야금 공공시설들을 장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대부분에 도시가스를 공급하는 회사인 (주)해양에너지는 GS에너지, 글랜우드PE를 거쳐 2021년에 맥쿼리의 손으로 넘어갔다. 2021년 포트폴리오를 보면 맥쿼리는 도로 12개, 항만 1개, 철도 1개, 도시가스 2개 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한 회사가 이 정도이니 다른 투자사들까지 모으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앞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신·재생에너지 관련 시설들이 대규모로 들어설 예정인데, 그런 시설들의 공공성은 누가 보장할까?

이런 중요한 질문들에 답을 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거울의 정치’만 하고 있다. 여당, 야당이라 하지만 좌우가 반전되었을 뿐 거울에 비친 같은 모습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할 뿐 변경의 삶에 관심이 없다. 마치 적선하듯 매년 얼마씩 줄 테니 조용히 하라고 한다.

양당제의 거울 정치를 지금 당장 부술 힘은 변경에 없고, 기후위기, 생존위기의 최전선에 내몰린 변경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입에 발린 공약으로는 차라리 다 같이 망하면 좋겠다는 상처받은 마음을 돌릴 수 없다. 그런데 변경이 무너지면 중앙도 무너진다. 외부와 경계를 만들고 자원을 공급하는 변경 없이 중앙이 유지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정치인들은 세를 과시하며 순시하듯 지역을 돌아다닐 게 아니라 절박하게 퍼지는 변방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 정치인을 기다린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훈련 지시하는 황선홍 임시 감독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라마단 성월에 죽 나눠주는 봉사자들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선박 충돌로 무너진 미국 볼티모어 다리 이스라엘 인질 석방 촉구하는 사람들 이강인·손흥민 합작골로 태국 3-0 완승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