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역사의 귀’로 노태우를 기억함

오창은 중앙대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교수

노태우 전 대통령이 10월26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노태우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50대에 접어든 내게 그때의 다짐은 강렬했다.

오창은 중앙대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교수

오창은 중앙대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교수

1991년 5월26일 새벽 4시경, 나는 대학생 기자로서 서울 백병원에 있었다. 전날부터 밤을 지새운 상태였다. 백병원 입구에는 프로판 가스통으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경찰이 백병원에 강제 진입하면, 누군가가 그 프로판 가스통을 터트릴 수도 있었다. 모두 극도로 긴장하여 예민해졌다. 경찰과 대학생들의 대치 상황은 성균관대생 김귀정의 시신이 영안실로 옮겨진 후에야 해소되었다. 죽음 곁에서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

김귀정은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 과정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 이전에는 강경대가 경찰의 쇠파이프 폭력에 희생당했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손석용, 양용찬,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국가 폭력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금도 가슴 아픈 희생들이, 연이은 죽음들이 떠오르면 나는 근원적인 슬픔에 빠져든다. 그해 5월, 어찌 내 마음에 웅크린 죽음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정신적 ‘재난의 시기’였다. 살아남은 내가, 이 상처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그때 다짐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 후, 공(功)과 과(過)를 따지는 평가들이 많다. 그의 공으로는 북방정책의 업적, 그리고 남북협력의 기반 마련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정치적으로는 6·29선언으로 ‘87체제’가 성립하도록 한 것이 거론된다. 한국사에서 그가 남긴 최대의 오점은 정치인 노태우 출발부터 크게 찍혀 있었다. 그는 1980년 민주화운동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5·18 중요 가해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끝내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직접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노태우는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2628억96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추징금을 확정 판결 받았다.

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따지고 저울질하는 것에 반대한다. ‘공’과 ‘과’를 동시에 거론하며 균형적 평가를 하려는 시도도 거부한다. 평가는 누구의 귀로 듣고, 누구의 눈으로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통치 행위가 미친 영향만을 바라보면, 과거 행위는 정당성이 부여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하지만 노태우 통치 시기에 고통받았던 민중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면, ‘공’도 사실은 ‘과’였음이 드러난다.

먼저, 노태우의 북방정책은 긍정적이었을까? 북방정책은 1991년 동유럽 공산권과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는 세계사적 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 대전환의 시기에 한반도의 평화공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가 중요하다. 북방정책으로 인해 북은 체제의 위기감에 휩싸였고, 오히려 한반도 긴장은 더 고조되었다.

다음으로,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를 포함한 한국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을까? 영화 <1987>에서 그려졌던 것처럼, 박종철 고문 살인 사건과 이한열의 안타까운 죽음이 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집한 민중의 힘이 아닌 노태우의 결단으로 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뤄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6월 항쟁은 시민민주주의 승리이고, 6·29선언은 노태우의 국민에 대한 항복선언이었다.

1987년 12월16일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611만표)과 김영삼(633만표)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828만표) 당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은 불안정한 지지 기반으로 인해 ‘억압과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학원안정화조치’는 이철규·이내창 의문사 사건, 학원프락치 사건, 1991년 5월 투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때의 문헌들을 읽으며, 내가 목격하고 아파했던 숱한 죽음들이 공안통치의 치명적 영향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와 함께 노태우 통치 기간을 견뎌냈던 이들은 국가 통치라는 ‘큰 역사’ 속에서 시민의 저항이라는 ‘작은 역사’를 만들며 살아남은 민중들이었다.

노태우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국가장을 반대하는 한국작가회의, 참여연대 등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성명서가 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해줬다. 전직 대통령이었기에 ‘국가장’으로 추모해야 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나는 강경대와 김귀정을 비롯한 1991년의 희생자들의 ‘작은 역사’를 기억하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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