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헌정사의 아이러니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두환 제11대·제12대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했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사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헌정에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남겨져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학살자로 명명될 역사적 과오와 함께 독재자로서의 그의 행적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평가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우선 전두환이 처음 대통령이 된 것이 독재헌법인 유신헌법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군사반란과 학살이 바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유신체제를 계승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되고 유신헌법의 폐기가 시대정신이었던 때 민주화운동을 군사력을 동원하여 탄압하고 유신헌법의 절차에 따라 국민의 주권을 대행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두환이 주도하여 제정한 1980년 헌법의 전문은 ‘제5민주공화국의 출발’을 선언하여 다섯 번째라는 차수를 스스로 못 박음으로써 유신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헌법이 실상은 유신헌법의 독재적 대통령제를 승계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지명하는 등 극단적인 요소는 제거하였지만 5공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체육관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국회해산권을 가지는 한편 비상조치권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정부와 법원의 권한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보다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독재적 대통령제 체제였다. 어쩔 수 없이 장기독재만은 포기하겠다는 정치적 명분으로 대통령 7년 단임제를 도입했다. 그마저도 직전 대통령이 당연직 의장이 되는 국정자문회의를 설치한 것은 5공 1기인 제12대 대통령 전두환이 오늘날 러시아 등의 독재적 대통령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섭정식 장기독재를 구상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단임제는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되어 오히려 국민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장기적 국정 운영에 구조적 장애가 되어 개헌론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독재자 전두환이 남긴 헌정체제의 그림자는 현행 87년 헌법체제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87년 체제는 사실 5공헌법 개정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유신헌법을 5공헌법이 승계하였으니 유신헌법 반대운동이 5공헌법 개정운동으로 진화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였으나 유신헌법 반대운동을 주도한 민주화세력의 정치활동을 금지함으로써 무늬만 민주공화국이었던 5공체제는 내각제개헌이라는 술수로 민심을 왜곡하려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자 4·13 호헌조치로 5공체제의 연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5공 독재헌법의 명운은 거기까지였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직선쟁취를 내건 6월항쟁이 노태우의 6·29선언을 이끌어내면서 결국 단명하고 말았다. 87년 민주헌법은 대통령 직선으로 국민주권을 강화하고 유신헌법의 주요 잔재를 청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주공화헌법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 독재자 전두환의 사망으로 87년 체제를 탄생시킨 장본인들이 모두 퇴장하였다. 87년 헌법체제의 출범 이후 7차례의 평화적 정부교체가 달성되고 세계무역 10위권, 소득 3만달러 시대를 여는 등 2차대전 이후 가장 성공적으로 시장경제와 민주공화제의 병행발전을 이룬 나라로 평가받는 성과를 얻었다.

헌정사의 아이러니는 독재헌법인 유신헌법과 5공헌법이 모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제5민주공화국’을 헌법에 명문화하여 인권보장과 민주주의를 절대적 공준으로 설정함으로써 스스로가 추구한 독재 체제의 모순을 자인한 꼴이 되었고, 그 헌법적 이율배반은 반유신과 반5공의 민주화운동이 헌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데 있다. 나아가 이름뿐인 민주공화헌법을 포장하여 독재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5공헌법이 곁가지로 헌법에 담은 행복추구권이나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환경권 등 기본권 규정이나 독과점 규제, 중소기업 보호, 소비자 보호 등 경제질서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조항들이 현행 87년 헌법에도 계승되어 민주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데 든든한 방파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헌정의 아이러니로부터 헌법은 독재자의 것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은 헌법의 최종적 저자, 곧 주권자 국민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재자 전두환이 저승에서라도 역사적 과오를 사죄함으로써 살아 움직이는 헌정의 아이러니가 선사하는 용서의 은사를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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