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이웃

서정홍 시인

누가 제게 ‘산골 농부로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웃’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대답은 변함이 없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산골 마을에 들어와 농부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빈집을 구해준 사람도, 땅 한 뙈기 없는 가난한 제게 먹고살아야 한다며 묵은 산밭을 개간해 주고 조건 없이 논을 빌려준 사람도, 지난해 농사를 안 지었으니 먹을 양식이 필요할 거라며 쌀과 콩을 갖다준 사람도, 농사지으려면 거름이 필요하다며 거름을 갖다준 사람도, 옥수수와 땅콩과 상추와 같은 온갖 씨앗을 손에 쥐여주며 심을 때를 가르쳐준 사람도, 풀 매는 시기와 북 주는 시기와 거두는 시기까지 자세히 일러준 사람도, 일손이 모자랄 때마다 자기 일처럼 일손을 거들어준 사람도, 며칠째 몸이 아파 누워 있을 때 녹두죽을 끓여준 사람도, 아궁이에 불이 나 집을 다 태워 버릴 뻔했을 때에 119보다 더 빠르게 달려와 불을 꺼준 사람도, 비탈진 언덕에 풀을 치다가 발목을 삐어 꼼짝 못하고 앉아 있을 때 병원까지 태워준 사람도, 바쁜 농사철에 국수 맛있게 삶아놓고 초대해준 사람도, 일부러 찾아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온갖 지혜를 나누어준 사람도,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닮아 살아갈 수 있도록 못난 저를 이끌어준 사람도 모두 가까운 이웃이었다. 도시에서는 바로 옆집이나 앞집에 사는 이웃을 몰라도 살 수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사는 게 더 편하다고도 한다.

서정홍 시인

서정홍 시인

얼마 전에 서울에 있는 어느 유치원 학부모 교육을 갔을 때였다. “올해, 가까이 사는 이웃을 집으로 초대하여 밥을 나누어 먹어본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머니들 가운데 한 분이 손을 들었다. 그분을 앞으로 모시고 물었다. “어떤 이웃이기에 집에 초대하여 밥을 나누어 드셨는지요?” 그 어머니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줄줄 흘렸다. 그리고 잠시 뒤,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리고 애를 둘 가진 엄마고요. 오늘 선생님 질문을 받으면서 하도 양심이 부끄러워 나왔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십 년을 살았는데 단 한 번도 이웃을 초대하여 밥을 나누어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마주쳐도 정답게 인사조차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보고 사는 앞집 아파트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점심이나 저녁 초대를 하려고 두드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관리소에서 하라는 대로 집 안 소독을 했는데 어느 날부터 바퀴벌레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관리소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주보고 사는 앞집 아파트 사람이 맞벌이부부라 소독을 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오늘 아침에 앞집 사람과 싸우기 위해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밥을 나누어먹자고 두드린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웃도 모르고 살아온 이런 내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라도 따뜻한 밥상을 준비하여 그 이웃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 어머니 말씀이 끝나자마자 모두 손뼉을 쳤다. 여기저기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도 있었다. 강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밤하늘을 보았다. 머리 위에 금세 떨어질 것 같은 별들이 산골 마을, 고단한 이웃들의 지붕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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