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시대와 386세대의 기억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오래전 이야기다. 삶의 흔적들로 기억 저편에 감춰져 있던 경험들이 며칠째 떠올랐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다.

만일 전두환씨와 쿠데타, 군사독재가 없었다면 인생은 혹시 바뀌었을까. 역사 평가 얘기가 아니다. 누구한테든 너무나 소중한 ‘한 번뿐인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전두환의 시대는 당시를 살던 많은 젊은이의 인생 행로를 한꺼번에 바꿨다.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A는 필자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다. 1986년 경찰에 연행돼 폭행당했다.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차디찬 구치소 맨바닥에서 생활하다 보니 디스크 증세가 심해졌다. 필자는 당시 ‘B급’ 수배 상태였다.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치사당한 직후 경찰에 붙잡혀 집행유예를 받고 출소했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현상금이 필자에게 건네졌다. 현상금의 절반은 A의 수술비로 지출됐다. 시와 문학을 꿈꾸는 문학도였던 A는 학원계로 발길을 옮겼다. 살다 보니 이젠 연락도 끊겼다.

1988년 어느 날, 인천의 한 스피커 제조업체. 당시 스피커 외장은 목재였다. 목재를 자르는 작업대의 톱날은 톱밥이 수북하게 쌓여 있으면 회전하고 있는지, 멈춰 있는지 구별하기 힘들다. 이 회사에 위장 취업했던 B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을 먹으러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B는 식사 전에 작업대를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싶었다. 장갑을 낀 손으로 톱밥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가락은 몇 토막으로 잘렸다. 잘린 손가락 마디들을 들고 인근 병원에 갔지만 수술이 쉽지 않았다. 서울로 옮겼다. 병원 측은 (병원 수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산재 환자라며 난색을 보였다. 가족들이 애절하게 부탁했고 수술이 시작됐다. 새끼손가락은 시간이 너무 지체돼 살리지 못했다.

B는 지금도 오른손에 장갑을 끼고 생활한다. 명문대 출신이지만 이력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시대였다. B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경력을 따질 필요가 없는 입시학원 쪽에 둥지를 틀었다.

C는 학생운동 이후 전국의 발전소를 돌며 설비를 점검·수리하는 하청업체에서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다. D는 귀농해 작은 두부공장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E는 취업하는 곳마다 적응하지 못해 경제적 궁핍함을 겪기도 했다. F는 위장 취업한 공장에서 해고된 뒤 생계유지를 위해 석재공장에 근무하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후 돌가루가 건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대학 출신이라는 조건과 현재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만을 기준으로 보면 다들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정치권에서 숱하게 비판받는 ‘386세대의 권력화·기득권화’와는 무관한 삶들이다.

1980년대 대학가는 암흑기였다. 학교 안에서 사찰을 벌이던 경찰, 페퍼포그 차를 앞세우고 대학 강의실까지 쳐들어온 백골단. 평범한 대학생들이던 이들은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자신들을 무장했다. 도서관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유인물을 뿌렸다. 시내 한복판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며 저항했다. 공장에 취업해 노조 결성에 앞장서기도 했다. 직장에서도 시대의 과제를 고민하면서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이들에게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를 우려하는 것은 사치였다. 묵묵히 시위대열에 동참했고 목청껏 구호를 외쳤다.

‘각자도생’하는 이들은 지금도 간혹 모여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들은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나섰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순수했던 ‘386세대’의 삶과 가치가 일부 정치권 386세대에 묻혀 폄하되는 세태를 더 아쉬워한다. 이들은 여전히 주어진 삶의 공간에서 건실하게 생활하고 있을 뿐이다.

전두환씨는 사망했지만 5·18민주화운동의 진실과 전씨의 역할은 여전히 밝혀야 할 과제다. 하지만 필자는 전씨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대다수 평범한 386세대의 순수했던 삶을 기존 386세대 비판론과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소박한’ 견해를 피력하고 싶다. 벌써 50대라는 세월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게 민초로 살고 있는 386세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다. 이들이 있었기에 민주화가 이만큼 진전됐다고 격려도 하고 싶다. 김민기의 노래 ‘아침이슬’처럼 젊음을 불사른 세대로 평가받기를 욕심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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