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내가 나일 수 없는 세계

박선화 한신대 교수

아름답고도 처연한 영화 한 편을 봤다. 레베카 홀 감독의 <패싱(Passing)>이다. ‘할렘 르네상스’라 불리던 1920년대 흑인 문화의 부흥기. 그러나 차별만은 여전히 엄혹하던 시절의 뉴욕. 백인 행세를 할 수 있을 만한 외모를 가진 두 흑인 여성의 다른 삶이 충돌하며 일어나는 비극적 사건을 다룬다. 관계의 빛과 그림자, 선망과 질투, 허위의식 같은 내밀하고 심층적인 서사에 인종과 계급, 젠더성 같은 무게 있는 주제가 고혹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다. 늘 정치·사회적 시선의 대상으로만 그려지는 다소 투박한 흑인 여성 클리셰에서 벗어나 섬세한 지성과 관능미를 가진 여성들이 등장하는 파격 또한 신선하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패싱’의 일반적 정의는 “특정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이 신분이나 정체성을 속이고 구성원인 듯 행세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성으로 보이기 위해 외모나 스타일을 바꾸는 젠더 패싱, 인종 간 결합으로 인해 남다른 외모로 태어난 이들이 다른 인종인 척 살아가는 행위 같은 것이다. 유색 인종이 백인 행세를 하는 경우가 다수지만, 흑인 운동가로 명성을 날리던 여성이 백인임이 밝혀져 논란이 된 적도 있다. 퓰리처상 수상작가이자 영미 문학계의 전설인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백인으로 살아가던 교수가 흑인 혐오자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몰락해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사회. 차이와 특질이 오점이 되고 수치가 되어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사회는 권력사의 숨은 그늘이다. 전라도 사람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니 “아, 쩌그 서울요”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권력과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과 차별이 개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웃픈’ 유머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을 숨기고 가짜 일본인으로 살아간 사람들은 얼마일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 고통을 충분히 겪은 나라에서 또다시 지역 차별을 만들고 조롱하는 비극을 반복한다. 대구 사는 전주 이씨와 이북 출신 서울 사람의 자녀는 어떤 정체성을 가졌을까. 세계의 경계가 무너져 가는 21세기에 왜 인간은 이토록 의미 없는 순혈 분류에 몰두하며 장벽을 쌓고 있는 것일까. 언제까지 광주와 5·18은 정치권과 일부 집단의 이익을 위한 이념과 지역갈등의 도구로 이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얼마나 어이없고 우스운 일인가. 무수한 삶을 파괴한 혐오와 증오의 원인이 그저 멜라닌 색소의 함량 차이일 뿐이라는 것은! 관계를 단절하고 왜곡하는 원인이 그저 태어난 땅이 다르고 그저 다수에 속하지 못하고 그저 나이와 성별과 학력이 달라서라는 것은!

SNS에 학력의 착시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명문대생이란 질풍노도의 10대 때 남보다 학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거나 방황을 덜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 이후의 삶이나 모든 분야에서 늘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더라는. 폭넓은 시야가 필요한 리더의 자질은 더구나 학력과 비례관계가 아니더라는 경험 글이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가운데, “본인이 명문대생이 아니라 이런 글을 쓴다”는 의심과, 반대로 “본인도 명문대생이다”라는 반론도 보였다. 이 병적인 학력사회는 학력파괴를 논증하는 글조차 학력인증을 받아야 가능함을 절감했다.

실력자로 인정받던 사람이 위조학력이 알려지는 순간 하루아침에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도덕성 문제일까. 학력이 없으면 기회가 없고 학력만 있으면 어떤 우매한 말과 행동을 해도 유능한 리더라 믿는 사회가 문제일까. 모든 이가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패싱’을 고민하는 세상. 무수한 차별과 편견의 세계를 살아내는 것이 하루하루 전쟁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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