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의 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16년 임기가 12월7일로 종료되었다. 이로써 메르켈은 헬무트 콜과 함께 최장수 독일 총리 자리에 올랐다. 올라프 숄츠 신임 총리의 후보 시절 선거 구호 중 하나가 ‘여자 총리처럼 할 수 있다’였으니, 메르켈을 향해 국민들이 보낸 두터운 신뢰를 가늠할 수 있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지난 12월2일에는 베를린 국방부 청사 앞에서 독일 연방군이 진행한 총리 고별 열병식이 있었다. 메르켈 전 총리가 연단에 올라 마지막 연설을 하고, 곧이어 연방군악대가 메르켈이 신청한 곡들을 연주했다. 그의 정치적 아버지 헬무트 콜이 베토벤 교향곡 중 ‘환희의 송가’를 골랐고, 메르켈도 잘 알려진 클래식 애호가이니 메르켈이 고른 곡들은 독일을 대표하는 고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메르켈의 선곡 리스트는 이랬다. 1974년 동독의 가수 나나 하겐이 부른 유행가 ‘당신은 컬러필름을 잊어버렸어요’, 1968년 배우 겸 가수 힐데가르트 크네프가 발표한 곡 ‘나를 위해 붉은 장미비가 내려야 해요’, 찬송가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그러고 보니 메르켈이 섰던 연단 양쪽에는 붉은 장미를 가득 담은 통이 놓여 있었다. 식이 끝난 후에 메르켈은 장미 한 송이를 뽑아 쥐고 후련하게 웃었다. 그 순간 ‘붉은 장미비를 내려달라’던 크네프의 곡이 다시 식장에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곡의 가사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보고, 경험하고, 지켜내고 싶어요. 나는 혼자이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메르켈이 보내는 연정의 노래처럼 들린 것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열병식 전후에 독일 언론들은 메르켈이 선곡한 곡들에 대한 해석을 일제히 쏟아냈다. 동독의 가요를 고른 것을 두고 동독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제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 남성 정치인들을 향해 우회적인 비난을 한 것이라는 해석. 그 밖에도 수많은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군이 치르는 가장 영예로운 자리인 총리 영별식에 50여년 전 유행한 동독 펑크록 음악을 선곡한 메르켈의 용기가 많은 이들을 적잖게 당황시켰을 것이다.

그는 그날 연단에 서서 이런 말을 했다. “거짓 뉴스가 훼방을 놓고, 두려운 사람들이 진실에 관련 없이 음모를 믿는 세상입니다. 미래는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대함으로써 함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화제성 기사가 쏟아지고 있을 시간에 메르켈은 담담하게 온갖 추측 뒤에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메르켈은 늘 그랬다. 너무 신중해서 ‘메르켈른’이라는 조롱조의 용어가 만들어질 만큼 비난을 받았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어서 많은 상대 정치인들이 답답해했다.

열병식 선곡을 향해 쏟아진 기사의 해석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메르켈 자신만 알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처럼 그가 열병식에서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임기 동안 몸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난민의 인권을 배제하지 않는 휴머니스트로, 고민할 때는 신중하고 결정할 때는 강단 있는 여성으로, 동서독의 진정한 사회통합을 염원하는 한 사람으로.

“국민들이 보내준 신뢰에 감사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는 “다른 시선을 인정하자”는 말을 남기며 연단에서 물러났다. 비상사태가 일반화된 지금의 세상에서, 혐오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치적 극단화를 목격하면서, 그 끝에 메르켈은 우리에게 ‘서로에게 조금씩 관대해지는 법이 없지 않다’고 주문하며 연설을 마쳤다.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보고, 경험하고, 지켜내고 싶었던’ 한 사람으로서, ‘혼자가 아니므로’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며 관용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정치적 신뢰는 어디에서 올까. 곧 큰 선거를 앞둔 우리에게 그 물음은 계속 이어진다. 서로를 신뢰하지는 못하겠지만 같이 가지도 않을 수 없어서 옆에 세워놓고 웃으며 사진을 찍는 일이 계속되는 정치, 누가 뽑히는 게 미래에 덜 불안할지 고민하는 국민들, 추락한 신뢰 속에 조작되는 권위, 갈등을 조장해 관심을 끄는 데 분주한 정치인들, 출신과 성별이 쿼터를 위해 활용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의 무심하고 지난한 싸움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짜 신뢰를 받는 방법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16년, 기나긴 여정을 마친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박사는 이제 한 사람의 독일인으로 돌아간다. 신뢰받는 인간, 단단한 어른, 그를 보며 부러운 건 나만이 아닐 것 같다. 우리나라에 언젠가 그런 존경받는 정치인이 나오는 날, 우리도 퇴임식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를 들으며 함께 눈물 흘릴 수 있길, 나는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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