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후면 도래할 ‘무죄공화국’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내년부터 피고인이 법정에서 ‘아니요’ 한마디만 하면, 수사받은 내용이 전부 사라진다면서?”

유언비어가 아니다. 2022년부터 대한민국에서 형사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내용 인정 안 합니다’라고 조서(서류)를 부인하면, 그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진술했던 모든 내용이 담긴 피의자 신문조서는 휴지조각이 된다. 판사가 그 조서를 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그렇다면 동의를 받고 촬영한 피의자 신문 영상녹화물(동영상)이나 그 녹취록은 판사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시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과 대법원 판례는 피의자를 신문하는 영상녹화물에 증거능력을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리해보면, 5일이 지나 새해가 오면, 피고인이 법정에서 ‘수사받으면서 했던 진술을 부인한다’는 말 한마디로 그 피고인의 수사기관 조서와 수사과정 녹화 영상, 그리고 그 영상의 녹취록 모두 사실상 폐기처분된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형사소송법 개정 때문이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경찰과 검찰의 수사권 조정 힘 겨루기가 계속되었고, 국회는 졸속으로 이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시쳇말로 피고인의 ‘의문의 일승’이다.

사법선진국이라는 다른 나라들은 어떠할까? 프랑스와 독일은 피의자와 참고인의 수사과정 중 진술을 모두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 일본도 전문법칙의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조서는 중요한 증거로 쓰인다. 피의자의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녹화한 영상녹화물도 대체로 증거로 활용하고 있다. 독일은 피의자 수사기관 영상녹화물을 진술 사실 입증에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일본은 아예 영상녹화를 의무적으로 하면서 그 녹화물을 법정에서 증거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부인한다’ 말 한마디로 피의자의 진술이 담긴 조서와 영상녹화물을 폐기처분시키는 입법례는 세계적으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피고인이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면 재판은 어떻게 흘러갈까? 이상적인 대책은 피고인을 법정에서 최대한 자세히 신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판사 1인당 연간 담당 사건은 464건으로 독일의 5배가 넘는다. ‘5분 재판’이라는 말은 법정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상당수 공감하는 말이다. 그래서 ‘조사자 증언제도’를 차선책이라고 들여왔지만, 제대로 작동할지는 의문이다. 3교대로 근무하며 밤낮으로 사건처리와 현장조사 중인 경찰이 과연 한나절 꼬박 걸리는 증인 소환에 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제일 만만한 수단은 ‘피해자 소환’이다. 피해자나 목격자인 참고인들이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을 담은 참고인 진술조서를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진술자는 다시 법정에 불려나온다. 법정에서 직접 ‘내가 진술한 것이 맞다’ 인정해야 그 참고인 진술조서를 증거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의 피해자가 모르쇠로 입을 다물고 있는 피고인을 대신하여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자 다시 법정에 가는 무거운 짐을 지는 형국이다. 그 과정에서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빙자한 모욕적인 2차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헌법재판소는 지난 23일,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 진술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쓸 수 있게 하는 법규마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범죄를 영상으로 이미 자세히 진술하였더라도 법정에 나가서 다시 증언해야 한다. 더 많은 피해자가 법정에 소환될 ‘각’이다.

만약, 장애가 있어서, 나이가 어리거나 많아서, 아직 트라우마가 남아서 법정에서 피해자가 피해 진술을 잘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유죄라고 보기에 충분한 증거가 없으면 무죄라는 형사소송법에 의하면 무죄가 선고될 것이다. 5일 뒤면 도래할 이 현실 앞에서 피해자들은 얼마나 큰 각오를 해야 피해를 알릴 수 있을까? 연말이 아니라, 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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