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 시인

새해에는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가 연이어 있을 예정이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내심 정치적 변화는 물론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 우리 몸도 마음도,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든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큰 이야기’에 기대보면, 당연히 선거라는 정치적 이벤트를 통해 어떤 식의 변화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적잖은 사람들이 그 변화에 너무 큰 기대를 갖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저 냉소에 그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선거제도로 상징되는 대의제가 정말 민주제인지 묻는 근원적인 물음이 제기되기도 한다. 사실, 때가 되면 찾아오는 선거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사고와 관념을 박제화시킨 면도 없지 않다. 즉 정치권력이 주권자를 실망시키면 선거를 통해 바꾸면 된다는 굳은 관념을 갖게 된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형해화된 민주주의를 살고 있는 셈이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5·16쿠데타의 충격에서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을, 김수영 시인은 1961년 여름 내내 보여주었다. 그러다 여름의 기운이 거의 빠져나갈 무렵인 9월의 마지막 날에 ‘먼 곳에서부터’를 쓴다. 1연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먼 곳”이 무엇인지에 대한 단언적인 해석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김수영 자신도 “먼 곳”이 어디인지, 또 거기가 어떤 곳인지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의 언어는 단순한 지시어도 아니고 사물이나 사건과 피상적인 일대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차원은 둘째 치고, 일단 김수영은 시를 ‘절대적 혁명’이라고 믿었다. ‘절대’와 ‘혁명’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사태나 정신의 어떤 극한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 곳”과 ‘절대’를 겹쳐 읽으면 너무 과한 것일까.

시는 역사와 반대의 길이 숙명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김수영의 “먼 곳”은 4·19혁명에 기댔던 그의 비원(悲願)이 혁명의 퇴행과 군사쿠데타에 의해 파괴돼 버린 것과 관련이 있다. 김수영은 4·19혁명을 통해서 잠깐 봤던 ‘하늘’이 현실에 패배하는 것을 겪으며 자기 영혼에 새겨진 ‘하늘’을 “먼 곳”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아예 모르면 몰랐을까 이미 알아버린 ‘하늘’을 현실 속에서는 “먼 곳”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기에 “다시” 아팠던 것이다. 김수영의 “먼 곳”은 기약 없는 그의 비원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로부터 6년 뒤에 쓴 ‘사랑의 변주곡’에서 그 “먼 곳”을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라고 표현했지만, 김수영의 ‘시의 마음’은 여전히 ‘먼 곳’을 꿈꾸다가 홀연 떠났다.

지난해 6월 초에 전남 광양에 있는 처가에 가서 하룻밤 있다 온 적이 있다. 밤이 되자 두 어른은 큰방으로 들어가시고 우리는 (예전의 마루와 토방을 개조한) 거실의 불을 끈 채 막걸리를 마셨다. 어둠 속에서 들판 건너 마을의 불빛을 말없이 보고 있는데, 내가 어둠이 되어야 비로소 어둠이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일어났다. 내가 밝으면 ‘먼 곳’을 상상할 수 없는데 우리는 그동안 ‘먼 곳’을 갖지 못한 채 여기의 밝음만을 위해 살아왔던 것일까, ‘먼 곳’이 없으면 눈앞의 것에만 매달리는 조급증을 앓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연이어 밀려왔다. 그 ‘먼 곳’을 가지려면 내가 먼저 어둠이 되어야 한다는 숙연함을 그날의 어둠이 가르쳐준 것이다. 김수영에게도 4·19혁명이 발한 밝음이 꺼지자 “먼 곳”이 찾아왔던 것일까. 이렇게 시에게는 역사와 반대의 길을 가야 하는 숙명이 있는 것일까.

선거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선거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 문제는 우리를 또 다른 사태 앞에 서게 한다. 이는 단순하게 어느 정파가 승리하느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물음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삶이 어떤 전환을 이루어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각자가 택할 실천과 그에 따른 고통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문제일 것이다. 선거의 와중에서 너도 나도 전환을 이야기하지만, 경험을 통해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그것들을 가리는 시금석으로 삼는다. 그들은 과연 ‘먼 곳’을 가졌는가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시의 마음’이 자리 잡게 해주고 또 바로잡아 준다.

시심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 전환

‘시의 마음’을 갖는 것을 고 김종철 선생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의 전환”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감수성의 전환”이 삶의 조건을 바꾸는 실천과 같이 가는 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시의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본래부터 있던 것이므로 전환에 앞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의 마음’의 회복, 즉 회심(回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새해를 맞는 나 자신의 비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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