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집과 학교, 학원을 뺑뺑이 돌면서 교과서와 참고서만 들여다보는 아이가 인간적인 성숙의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다. 창의적인 인재가 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할 것이다. 시험공부만 한 아이가 자라서 작가가 되기는 힘들다. 삶과 분리된 교육으로는 학습에 흥미를 느끼기도 쉽지 않다. 입시교육의 한계를 자각한 공교육이 학교 담장을 낮추고 지역사회와 소통하고자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경험교육이 강조되면서 초등학생들의 현장학습이 늘어나고, 중학교 자유학기제가 시행되면서 체험학습 전문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하지만 한두 시간 흙을 만져본다고 도자기 빚는 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도공은 그릇을 빚기 전에 흙 속의 공기를 빼고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기 위해 흙을 치대는 작업을 하고 또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흙의 성질을 알게 되고 기술을 손에 익힌다. 흙을 주무르고 또 주무르다 보면 흙과 물, 공기의 관계가 읽히고, 손바닥의 온도에 따라 흙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느낄 수 있다. 그릇을 빚는 끝없는 반복 작업 과정에서 보통 사람은 자각하기 힘든 미세한 손끝의 압력 차이로 그릇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해야만 원하는 형태의 그릇을 만들 수 있다. 예술성은 그 기술에 가미되는 양념 같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대학을 연극영화과로 진학하지 않고 사회학과를 선택한 것은 영화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멀리 내다보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기술은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예술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 예술이라는 큰 그릇 속에는 기술도 들어 있고 철학도 담겨 있다. 뛰어난 예술가는 기술을 마스터하고 그 기술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눈을 감고도 그릇을 빚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작품이 빚어진다. 끝없는 반복 작업 없이는 이를 수 없는 경지다. 거기에 예술적인 안목이 더해질 때 비로소 작품이 탄생한다.

요리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일류 요리사의 음식 솜씨는 같은 요리를 만들고 또 만드는 과정에서 터득되는 미세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창의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손발이 닳도록 하고 또 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무엇이다. “요리사는 고된 작업을 반복하는 직업인일 뿐 예술가가 아니다. 요리를 예술이라 착각하고 끼를 펼치겠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어느 유명 셰프가 말했다. 직업적인 요리사의 세계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일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작고한 임지호 셰프는 다큐멘터리 <밥정>에서 요리가 사랑임을 보여준다. 음식에는 마음이 담겨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기술을 넘어 예술의 세계로 그를 이끌었다.

실제로 요리는 콩밭 매는 일만큼이나 단순반복적인 일이다. 방송에서는 잘 손질되어 조리대에 놓인 재료들로 순식간에 조리하는 과정만 보여주거나 과장된 동작으로 소금을 뿌리는 쇼맨십으로 환상을 갖게 만들지만, 요리의 팔 할은 재료 장만과 손질 등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궂은일들이다. 한두 시간의 체험학습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창의성 교육의 일환으로 체험학습을 강조하지만, 맛보기 체험으로 창의성이 길러질 리 만무하다. 같은 요리를 하고 또 하는 동안 재료를 익히는 시간의 미세한 차이, 양념의 오묘한 배합 비율 등 요리의 미묘한 맥락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이 담기고 혼이 담길 때 요리는 예술이 된다.

어떤 분야에서나 고수는 일의 원리를 안다. 장인을 넘어선 예술가는 기술과 원리를 숙달하고 거기서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단순반복 작업을 ‘단순히’ ‘반복’하기만 한다면 흔한 기술자가 되는 데 그치지만, 반복 속에서 미묘한 차이와 맥락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창의가 일어나고, 거기에 마음이 담기면 기술을 넘어 예술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모든 아이들이 예술가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예술성은 우리 삶의 깊이를 더해주고 풍요롭게 한다. 예술은 교육의 바탕이다. 교육은 인간을 빚는 교육예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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