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벽, 피 묻은 짜장면

한윤정 전환연구자

새해 초입부터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거대한 폐허이다. 광주 서구 화정 아이파크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사고는 화려하지만 여전히 부실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프리미엄이 4억원까지 붙었다는 초일류 아파트의 골조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영하의 날씨에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 1명이 죽고 5명이 실종됐다. 과거에 잘못 지은 건물이 아니라 지금 재벌기업의 건설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콘크리트가 굳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들이붓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일어난 일로 윤곽이 그려진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한윤정 전환연구자

콘크리트와 철근이 뒤엉킨 건물 잔해는 기시감을 일으킨다. 1995년 서울 서초동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떠오른다. 지을 때부터 부실공사였고 붕괴조짐을 무시했다. 사상자가 1500여명으로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였던 삼풍사고는 2년 후 닥친 외환위기와 함께 고속성장시대의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는 안산 단원고 학생 등 304명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또한 ‘안방의 세월호’라 불린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2016년 밝혀지면서 지금까지 집계된 사망자만 1500명을 넘는다. 모두 기업의 이익만 추구한 탓이다.

지난해 한국은 선진국이 됐다. 195개국이 가입한 유엔무역개발회의는 한국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재분류했다. 분류가 바뀐 건 한국이 유일하다. 여기에 K방역, K콘텐츠의 성공으로 국격이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사상누각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넷플릭스의 역사를 다시 쓴 <오징어 게임>과 <지옥>의 내용은 음울하기 그지없다.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 자본주의, 정체 모를 불안과 죽음의 그림자가 K콘텐츠의 실체이다. 그런데 내용이 아니라 순위, 명성, 경제 가치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정신적으로는 선진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번 정권은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다. 최저임금을 올리려다 안 됐다. 부동산 가격을 잡으려다 안 됐다. 검찰개혁을 하려다 안 됐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려다 안 됐다. 언론개혁을 하려다 안 됐다. 기업 이익추구 과정에서 벌어지는 산업재해, 시민재해를 막으려는 중대재해처벌법도 누더기라는 오명을 쓴 채 겨우 통과됐다. 물론 대통령과 여당의 무능과 잘못만은 아니다. 그만큼 기득권의 저항은 거세고 질서를 바꾸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중대재해처벌법만이라도 제대로 자리잡으면 좋겠다. 지난해 1월8일 국회를 통과한 이 법은 오는 27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과거 산업안전보건법이 사업장 단위의 처벌이었다면 중대재해처벌법은 최고 경영자의 책임을 묻는다. 시행 직전에 일어난 아이파크 붕괴사고는 이 법을 피해간다. HDC현대산업개발은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려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라진다. 비단 현대산업개발만이 아닌, 전체 기업에 대한 경고의 차원이다.

기후위기, 팬데믹이 미래의 위협이라지만 일하다가 죽지 않도록, 일한 만큼 보상받도록 노동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소용없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면서 자연을 살리자는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떤 설득력을 갖겠는가. 그 원칙은 생명을 돈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자는 동일한 것이다. 약자의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빠른 시간에 많이 생산해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대는 지났다. 선진국 위치에 걸맞은 공존의 도덕과 윤리가 필요하다.

지난 연말에 비슷한 일을 눈앞에서 겪었다. 어스름한 저녁,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다가 배달 오토바이 두 대가 쓰러진 장면을 연달아 보았다. 한 대는 택시와 부딪쳐 쓰러져 있었고, 차에서 내린 택시운전사가 꼼짝 않는 배달원 옆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로부터 수백 미터도 가지 않아 이번에는 한 차선이 유난히 밀렸는데, 버스와 부딪친 배달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었다. 연말이라 배달물량이 많고 도로는 블랙아이스로 덮여 미끄러운데 빨리 가려다보니 벌어진 일일 것이다.

일하다가 다치거나 죽는다는 점은 똑같지만 이들은 중대재해처벌법 대상도 아니다. 플랫폼노동자의 죽음은 교통사고일 뿐이다. 라이더스 유니온을 지원하는 소설가 김훈은 자신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피 묻은 짜장면’을 들었다. 길을 가는데 오토바이와 배달기사가 쓰러져 있고 핏자국 옆에 짜장면이 쏟아져 있었다는 인터뷰 내용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 우리가 먹는 짜장면에 누군가의 피와 그 가족들의 눈물이 서려 있다면, 과연 편하게 먹고 잠잘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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