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쓸모

최준영 책고집 대표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힘든 일이 뭔지 아세요? 정치경제학을 읽는 일이에요. 특히 당신이 쓴 정치경제학.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저들(경찰)은 당신이 쓴 정치경제학을 읽지 않을 거예요.” 막 탈고한 <자본>을 경찰에 빼앗겨 상심하고 있는 남편 마르크스에게 아내 예니가 건넨 위로의 말이다. 듣고 난 마르크스가 답한다. “그런데 말이오. 정치경제학을 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뭔 줄 아시오? 그건 바로 정치경제학을 쓰는 일이라오.”

최준영 책고집 대표

최준영 책고집 대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들려준 일화다. 상상컨대, 마르크스 부부는 <자본>을 읽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처음에는 소수의 추종자들만 읽었지만 점점 힘을 얻게 되자 자본가들도 긴장했고, <자본>을 읽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 카를 마르크스는 탁월한 경제적 통찰에 이르렀다. 그 통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예측으로 이어졌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산업혁명의 선봉에 선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나라에서 시작할 것이고, 그런 다음 다른 나라들로 확산될 걸로 확신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진단과 예측을 받아들이면서 그에 따라 행동도 바꾸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민을 정치체제 안으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선거에 나가 투표하기 시작하고 노동당이 여러 나라에서 잇달아 권력을 잡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여전히 안심하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 혁명은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산업 강국을 집어삼키지 못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마르크스의 예측은 또다시 빗나갔다. 그 부분에 대한 하워드 진의 통찰이 예리하다. “자본주의의 패망을 예측한 마르크스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모순으로 망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자기모순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사실 말이다.”(하워드 진,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역사 지식의 역설이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한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날씨 같은 복잡한 시스템은 우리의 예측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의 발전 과정은 우리의 예측에 반응한다. 예측이 훌륭할수록 더 많은 반응을 유발한다. 그러나 지식이 축적될수록 예측은 어려워진다. 예상 가능한 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역사 공부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지 않지만, 적어도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마르크스의 예측들은 빗나갔지만, 그는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줬다. 덕분에 지금 우리는 보다 넓고 높은 세상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게 됐다. 부족하나마 하워드 진과 유발 하라리, 슈테판 츠바이크 등을 읽은 덕분에 이쯤의 글을 쓴다. 공부의 쓸모다. 당장 먹고사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축적된 공부는 확실히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역사에는 답이 없고, 책에는 길이 없다. 그러나 삶의 답을 얻고 생각의 길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책은 인류의 기억이다. 인간은 기억을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렇게 누적된 기억이 바로 책이다. 책을 통해 세상에 나 있는 길과 내 마음의 길을 연결시키는 것이 공부다. 해마다 이맘때쯤 한 해의 공부계획을 세운다. 올해는 과학 공부다. 21세기의 기초인문소양은 단연 과학이다. 여럿이 함께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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