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에 하고 싶던 대화읽음

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결혼식을 앞둔 후배가 찾아왔다. “언니, 저 드디어 집 계약했어요. 와이프 회사랑 저희 회사 딱 중간 위치에 괜찮은 집이 있더라고요. 혼인신고를 미리 해서 신혼부부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었어요. 계약서 쓰니까 진짜 결혼한 느낌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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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축하해. 신혼여행은 예약했어? 대선에서 신혼부부를 위한 공약이 쏟아지던데 꼼꼼하게 잘 챙겨봐! 그렇게 경쟁적으로 핍박하더니 이제 정치인들도 기업들도 동성커플들에게 잘 보이려고 난리더라.”

“아이고 언니…진짜 옛날 사람이다.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은 무려 2022년이에요!!”

2022년쯤 되면 정말 이런 대화를 할 줄 알았다. 동성커플인 영화감독 김조광수씨 부부가 서울 서대문구청에 혼인신고를 하려다 ‘수리 거부’ 당한 것이 2013년 12월. 앞서 그해 10월엔 부산에서 60대 여성 A씨가 동성연인 B씨와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졌다. B씨가 암에 걸린 뒤 그를 간병하던 중 경제적인 문제로 B씨의 가족과 마찰이 생긴 뒤, A씨는 주거침입죄와 절도죄 등으로 신고당했다. 병원 면회조차 금지됐고 B씨의 죽음도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고교 졸업 후 40년을 함께 살았지만, 법적으론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이런 일들은 당장 몇년만 지나도 문명 시대 이전의 이야기처럼 부끄럽고 아득한 일이 될 것이라 믿었다.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이렇게 계속될 리 없다고.

9년이 지났다. 지난 7일 서울행정법원은 동성커플인 김용민씨 부부가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달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혼인은 남녀의 결합을 근본으로 한다”며 “혼인제도는 원칙적으로 입법의 문제”라고 밝혔다. 두 달도 남지 않은 대선에서 ‘동성결혼 합법화’나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세운 유력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2020년 김규진씨가 쓴 에세이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동성의 연인과 결혼을 앞둔 딸이 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한다. 떨리고 어색한 자리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외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내 본관을 다르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동성결혼도 30년 뒤엔 아무것도 아닐 거야.” 이 장면은 감동적이면서도 슬프다. 아버지가 자신의 비밀을 꺼내 딸의 사랑을 위로하고 응원해준다는 점에서 감동적이고, ‘30년 뒤엔’이라는 전제가 붙는다는 점에서 슬프다.

한국에서 동성결혼은 2052년쯤에나 가능해질까. 우주탐사기업 ‘스페이스X’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화성에 인구 100만명을 보낼 수 있다고 목표한 때가 2050년이다. 김규진씨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동화 속 공주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아니더라도, 레즈비언 할머니 부부는 드디어 건강보험료를 같이 낼 수 있게 됐다는 해피엔딩이면 좋겠다.”

2022년은 이제 시작됐고 후배와의 대화가 상상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차라리 화성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는 게 빠르겠다는 슬픈 농담이 농담으로 그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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