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커피와 고요

고영직 문학평론가

어느 장소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을 ‘케렌시아’라고 부른다. 원래는 에스파냐어로 ‘투우 경기장에서 소가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장소’라는 뜻이었으나, 자신만의 피난처 또는 안식처를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나를 위한 장소라고나 할까.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누구나 나를 위한 장소가 있다. 그곳이 동네 술집과 카페 같은 곳일 수 있고, 작은 서점·도서관일 수 있으며, 산·바다·강 같은 특정한 자연 공간일 수 있다. 나를 위한 케렌시아는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한다. 그런 장소에서는 나 자신이 편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나 역시 동네 단골 술집을 비롯해 유독 마음 편한 장소들이 여럿 있다. 이곳에 가면 나 자신이 주인장이라도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처음 간 누군가를 위해 환대할 용기를 곧잘 발휘하곤 한다. 그런 장소들 중 한 곳이 제주 조천읍에 소재한 북카페 ‘시인의집’이다.

시인의집은 저자들이 직접 서명한 친필 사인본 시집을 판매하는 책방이다. 친필 사인본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책방은 전국에서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십수 년 전 시인의집 주인인 손세실리아 시인이 이곳을 처음 목격했을 때는 버려진 집이었다.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바닷가 늙은 집’)에 매혹되어 백년 누옥을 매입하고 덜컥 입도(入島)했다. 그리고 생초보가 카페를 오픈했다. 이른바 ‘제주 러시’가 있기 전인 40대 후반의 일이었다.

입도 후 십수 년이 지났지만, 시인의 생애전환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살이 중간결산 격으로 출간한 산문집 <섬에서 부르는 노래>를 일별하며 느낀 단상은 시인은 자신만의 장소에 확고히 뿌리를 잘 내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빠! 어디 가?> 같은 방송 전파를 타며 유명세를 치렀지만, 그것은 시인이 추구하고자 한 삶이 아니었다. 오로지 시가 깃들 고요가 있는 삶을 원했다.

시인이 ‘시와 커피와 고요’가 있는 삶을 원했다는 소박한 문장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어쩌면 시인의 이런 태도는 작고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정말이지 인문학은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일상에서 실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손 시인이 거창하고 화려하고 빠르고 떠들썩한 화제보다 소소하고 여리고 고즈넉하고 낮은 것들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그래서 충분히 이해된다.

나는 손 시인의 모습에서 ‘화안시(和顔施)’의 실천을 본다. 화안시란 다정한 얼굴로 상대를 대함으로써 베푼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일본에서 100세 정신과 의사 할머니로 알려진 다카하시 사치에는 나이가 들수록 화안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상대의 마음을 단 1밀리미터만 흔들어도 그것은 어엿한 베풂”이라고 한다. 제주에 미(美)친 시인 손세실리아의 산문집을 보면서 땅 한 평 값보다 행복 한 뼘의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한다. 방문객의 지갑보다 마음이 열리기를 바라는 시인의집 같은 곳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외연하게 쇠락하길 바라며”(‘바닷가 늙은 집’) ‘책방 할매’로서 잘 늙어가기를 바라는 시인 같은 사람 또한 많아지기를 바란다. 나의 생애전환, 고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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