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몰랐어, 내 맘이 이리 다채로운지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엄마 말은 지독하게 안 듣고 컸지만 그 말 중에서 나 좋을 대로 가슴에 새긴 건 하나 있다. “젊을 땐 모르는 게 당연하다.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하고 고개 숙여라. 그게 기특해서 어른들은 다 가르쳐 줄 거다.” 그래서 나는 모르면 알 때까지 물었고, 알아도 일단 묻는 것부터 시작했다. 엄마 말이 맞았다. ‘잘 모르니 가르쳐 주십쇼’ 하는 요청을 거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궁지에 몰리고 위기를 맞을 때마다 고개를 숙이며 힘을 빌렸다. 그렇게 20대 내내 ‘무엇이든 물어보는 젊은이’로 어영부영 즐겁게 살았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엄마, ‘젊은 때’란 건 대체 몇 살까지 포함되는 거야?” 작년부터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이제 나를 향해 질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인데. ‘잘 모른다’고 회피하려 하는데, 그간 내가 받아온 도움들이 발목을 잡았다. 한번 시작한 확신 없는 멘토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더는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것이 어렵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역시 조심스러워졌다. 엄마는 그게 다 ‘나잇값’을 서서히 치르는 거라고 말했지만, 이 갑작스러운 포지션 변화는 나를 거대한 혼란에 빠트리고 말았다.

나는 의존적인가? 아니다. 나는 독립적이다. 아니 솔직히 모르겠다. 난 MBTI 테스트를 해도 매번 결과가 다르게 나온다.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대충 지어내서 대답할 정도다. MBTI를 종교적으로 믿는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너는 왜 맨날 대답이 바뀌냐’고 물었다. 나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MBTI 그런 거 안 믿는다. 감정이나 상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테스트는 신뢰할 수 없다”고 답했다. 친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처럼 자꾸 검사 결과가 달라지는 사람은 ‘ISTP’래.”

나는 내향적인가? 외향적인가? 어떤 날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싫어서 혼자 구석진 자리에 앉아 스스로 고독에 빠지는데, 어떤 날은 사람들 사이에서 감정과 에너지를 쏟아내며 미친 듯이 뒤엉키기도 한다. 어제는 나의 궁핍한 처지를 누군가에게 드러내서 동정을 받고 싶고, 오늘은 왠지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허영과 싸운다.

어떤 자리에선 신조어를 남발하며 철없이 어린애처럼 굴고 싶고, 또 다른 자리에 가면 왠지 현명한 어른처럼 보여야 할 것 같아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미소만 짓는다. 아무래도 별난 과도기에 접어들어 내 모든 주관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변덕도 ISTP의 고유한 특성일지 모른다.

지난주엔 유튜브에서 <진원의 나이테>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국립공원연구원에서 기후변화 모니터링 업무를 하고 있는 김진원씨의 이야기였다. “사람한테 영향을 준다고 하면 즉각적으로 관심을 받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나무는 그런 존재가 아닌 거죠.” 고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도 내가 사는 동안 저렇게 오롯이 한 종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 진원씨는 점점 사라져가는 고산지대의 침엽수를 관찰하며 ‘성과를 만들고 싶은, 이해한 걸 공표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길고 고요한 ‘나무의 시간’에 묵묵히 자신의 일과를 바친다.

세상엔 어리고 푸르렀다 고목이 되어 사라지는 나무들이 있고, 끝내 답을 구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 앞에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저 나무 하나만 이해하고 죽어도 행복하겠다”는 진원씨의 말과 고사한 구상나무 곁에서 이제 막 얼굴을 내민 어린 나무 덕분에 그날은 요동치던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문득 나무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계속되는 나의 불안은 나잇값을 치르라 소리 지르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깊숙이 나만의 나이테를 만들어야지. 그래서 MBTI 테스트는 당분간 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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