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생굴, 타이포그래피의 고향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해묵은 숙제를 안고 정초부터 경북 청량산의 김생굴을 찾았다. 암벽뿐인 하늘에는 고드름만 열려 있다. 허황(虛荒)하기 짝이 없다. 컴컴한 동굴이 아니어서 플라톤이 주문한 등불도 그림자도 없다. 그러니 허상과 이데아의 잣대로 ‘해동서성’ 김생의 글씨를 논할 여지도 없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퇴계의 탄식만이 부는 바람에 온 산에 날린다. ‘죽은 창힐 왕희지 그만 찾아라. 천 살 김생이 눈앞에 살아있다. 괴기한 필법은 바위 폭포에 매여 있구나. 아, 김생은 대답 없고, 김생 되기도 어렵다.’(퇴계 이황의 시 ‘김생굴(金生窟)’)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떠듬떠듬 오간 대화 속에 오백년 전 퇴계나 지금의 내 맘속은 매한가지다. 허망한 심사에 서(書)의 허실도 분간 못하는 내 머리통을 내려치는 사람 또한 퇴계다. ‘괴기(怪奇)한 필법’의 김생체 본모습이 바로 ‘바위폭포(巖瀑)’라는 통찰이다. 그렇다. 김생체는 바로 청량산의 바위와 폭포이고, 바람이고 산봉우리다. 묵강(墨江)에다 탁필봉·연적봉은 물론 봉녀의 전설까지 더하면 청량산은 그 자체가 김생굴이 되고, 김생체의 모태가 된다.

플라톤의 우화대로라면 청량산의 밤이 동굴 안 그림자고, 빛의 세계인 낮은 동굴 밖 이데아다. 밤낮과 안팎이 둘이 아니듯 청량산과 김생체 또한 쏙 빼다박았다. 둥글고 넓적한 글꼴에서부터 점인 듯 획인 듯한 필획이 그러하다. 그야말로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似如不似) 경지가 청량산과 김생 글씨의 관계다.

김생 글씨의 성분은 또 어떤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박한 글씨와 중국의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의 서법이 제대로 버무려져 있다. 여기에다 청량산의 형상과 기세(氣勢)까지 녹아나온 ‘삼만 근 무쇠 활(千鈞之弩)’ 필획의 탄력은 글씨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하다. 그래서 김생체는 삼국을 넘어 동아시아 문자문명을 하나로 녹여낸 통일체다. 김생 글씨는 원융무애한 석굴암과도 미학적으로 동궤를 이룬다. 봉화 태자사에서 용산 국립박물관으로 이사가 살고 있는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가 그 증거다. 이런 맥락에서 김생굴은 8세기 통일신라 황금기 화엄불국의 아름다움을 둥글둥글한 글씨미학으로 꽃피워낸 용광로이자 문자문명의 성지로 재탄생되어야 한다.

하지만 김생에 대한 이런 찬사도 모두 다 허사가 된 것이 오늘날이다. 기계시대를 사는 우리는 서맹(書盲)이나 다름없다. 일상의 문자문명도 한글전용이고 붓과 볼펜쓰기는 키보드 치기에 점령당한 현실이다. 그런데 파주 타이포그라피학교 안상수 교장은 왜 김생굴을 오매불망 노래 부를까. 동양의 서(書)와 서구 타이포그래피는 족보, 문자, 도구, 미학에 이르기까지 상극이 아닌가. 한국의 서예가들조차 김생굴 순례는커녕, 해동서성 김생의 존재를 망각한 지 오래다. 하지만 김생굴에서 만난 안 교장의 대답은 옹골차다. “타이포그래피의 고향이다”라는 것이다. 순간 나는 또 한 번 머리통을 얻어맞았다. 드디어 본정신이 돌아온 것은 안 교장보다 오히려 나 자신이다. 서구화 100년이 넘도록 남남으로 살아온 타이포그래피가 서(書)를 영접한다는 것은 문명사적 사건이다. 동서는 물론 인간과 기계가 하나로 제3의 문자문명을 창출하는 씨앗을 김생굴에서 심었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었지만 음치인 나도 퇴계의 노래에 답가를 불렀다.

“피카소도 좋지만 추사 또한 피카소다. 점선면도 필획도 하늘땅에 매여 있고, 큐비즘도 기괴도 둘이 아닐세. 추사와 피카소도 무언으로 미소 짓네.”

그러고 보면 왕희지체, 김생체, 큐비즘, 추사체도 모두 바위와 폭포의 그림자다. 이는 ‘서(書)가 자연에서 비롯되었다’는 서론을 들이대지 않아도 자명하다. 예술이 그림자라면 자연은 이데아다. 삼라만상의 원점이라 할 텅 비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태허(太虛)의 세계야말로 예술의 모태다. 그렇다면 가속화되고 있는 기계시대, 우리 문자예술의 이데아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당연히 자연이고, 그 본거지가 김생굴이다. 허황하기 그지없는 김생굴의 바위와 폭포야말로 우리 문자문명의 자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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