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사람과 시간, 빈자리 채우기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지난 9일, 민주화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배은심님이 애타게 그리웠던 자식 이한열 열사의 곁으로 떠나셨다. 고인을 알고 지내 온 지 10년이 되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을 만나온 당신이었지만, 이한열 열사와 이름이 비슷한 나를 각별히 챙겨주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1990년생인 나에게 민주화운동 시절 희로애락의 감정이 사실관계 이상으로 전달되기 사실상 어렵다. 30여년 전의 화려한 서사만 남아 있는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인이나 단체 대표의 회상에 지치던 참이었다. 하지만 고인과의 대화는 달랐다. 고인의 목소리를 통해 책 속의 역사가 현재에 재현됐다.

고인의 증언은 과거의 영광이 아닌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깊고 치열한 생존기였다. 당신이 거리를 직접 지키고 있는 동안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에 갇혀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유가족들의 깊은 상처를 통해 만들어왔던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언제까지나 현장에 계셔주길 바랐다. 야속하게 시간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1980년대와 오늘의 시대적 디졸브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두환과 노태우의 시간은 먼저 마무리되었다. 분노할 대상조차 역사책의 이름으로 남았을 뿐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처럼 시민사회와 생활정치의 한복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사람 중 상당수가 역사의 평가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굳건하고 꿋꿋하게 이어갈 구심점도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흘러간 빈자리를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이 채우기보다 차별, 혐오, 불평등이 대체하고 있다. 공론장이 자리 잡기보다는 자극적인 유튜버들이 약자에 대한 혐오를 양산하고 있다. 투기와 경쟁을 좇는 욕망의 사회는 힘이 넘쳐나고, 소수자를 갈라치는 정치인에 열광한다. 코로나19 시국과 겹쳐 시민사회가 시민에게 가닿는 영향력도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 견제조차 할 수가 없다. 미래 이슈는 차치하고 배은심 어머니의 평생 과제였던 민주화유공자법을 비롯한 먼지 쌓인 과제들조차, 기대보다는 좌절할 일이 더 많을 것만 같다.

매년 이한열 열사 추모제를 찾는 학생들이 줄어들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힘입어 조직된 대학 학생회도 구성 자체가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민사회의 정체된 상황도 매일 실감한다. 그때의 사람과 방식이 오늘로 연결되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은 지금, 새로운 틀에서 어젠다, 사람, 기획, 조직 등을 전향적으로 바꾸고 채워나가는 작업에 더욱 집중할 때가 되었다. 비호감 대선이 한창인 가운데, 적어도 시민사회는 시민과 분리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할 테다. 지난 시간의 빈자리를 잘 채우는 것이 배은심 어머니의 뜻을 온전히 기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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