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 이토록 시각적인 노래읽음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슬아의 날씨와 얼굴]수어, 이토록 시각적인 노래

손으로 노래를 그리는 사람을 본다. 그들은 손가락과 손등과 손바닥으로, 콧잔등과 입술과 볼과 눈썹으로 노래를 옮긴다. 수어 통역사들이 해내는 일들 중 하나일 것이다. 얼마 전 수어통역사와 나란히 무대에 섰다. 그날 내가 소리 내어 부른 노래 가사는 이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때 수어통역사님은 내 오른편에 서 계셨다.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내가 노래하자마자 그가 물 흐르듯 양손 검지를 흐르게 하더니 두 손바닥을 잠시 부르르 떨고선 두렵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이라고 내가 노래하자마자, 그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턱끝에 살짝 톡톡 친 뒤 뭔가를 잃는 사람이 상심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까처럼 양손을 다시 부르르 떨고선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장혜영 국회의원의 지난 의정보고회에서의 무대였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동안에는 관객들을 바라보느라 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볼 수가 없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유튜브에 업로드된 영상을 보고 나서야 그가 나와 함께 노래하고 있었음을, 어쩌면 나보다 더한 노래를 그가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 소절에서는 내 왼편에 있는 장혜영 의원과 내가 동시에 이렇게 노래한다. “흐르는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리랄라.” 우리가 ‘라라라’하고 노래할 때 수어통역사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댔다가 선율에 맞춰 그 손가락이 천천히 멀어지게 했다. 노래가 입에서 퍼져나가듯이. 리듬을 타고 흘러가듯이. 노래라는 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음성 언어에서 시각 언어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음악은 ‘듣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동료 작가인 이길보라의 책에서 처음 만났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청인 이길보라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다. 그는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로서 비장애 중심사회와 청인 중심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의 사회비평집 <당신을 이어 말한다>에서 이길보라는 농인 감독이 만든 영화 <리슨>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

“손, 얼굴, 신체에 의해 만들어진 멜로디와 리듬은 ‘음악’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 영화는 ‘음악은 듣는 것’이라는 관념을 전복한다. 등장인물은 침묵 속에서 ‘음악’을 시각적으로 그리는 시도를 한다. 다양한 얼굴 표정과 수어로 시각적 음악을 만든다. (…) 시각적으로 풍성하고 풍부한 이 장면은 농인에게 소리란 어떤 것인지, 음악은 어떤 개념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 보여준다. 청인으로 살아온 내게 ‘음악’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이길보라의 질문과 함께 나는 수어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동시에 얼마나 더 많은 곳에 수어가 필요한지를 생각한다. 수어통역을 제공받을 권리는 농인의 기본권이자 정보접근권이다. 더 많은 화면에, 더 많은 장소에 수어통역이 있어야 한다. 통역의 양뿐 아니라 질도 중요하다. 수어통역이 필요한 인구수에 비해 자격증을 취득한 수어통역사가 많지 않은 현실이다. 들을 권리만큼이나 볼 권리도 폭넓게 촘촘히 보장되어야 한다. 이길보라의 문장에 따르면 “수어는 얼굴 표정을 보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언어다. 얼굴 표정이 의미 전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수어통역사가 나보다 더한 노래를 하고 있다고 느낀 것도 그래서다. 노래는 수어통역사의 손과 이목구비를 통해 농인들에게도 풍부한 무엇이 되어 전해진다.

작년부터 노래에 대한 작은 책을 쓰고 있다. 그 책을 쓰면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책 <떨림과 울림> 속 한 문장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세상은 볼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하다”는 문장이었다. 우주와 빛과 소리와 진동에 대한 그 은유에 나는 매료되었다. 노래 역시 보이지 않는 떨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도 얼핏 아름다운 은유처럼 느껴졌으나 청인들의 사회에서만 유효한 은유일 것이다. 이제 나에게 노래는 ‘볼 수 있는 떨림’으로 다가온다. 수어통역사와 함께 노래하고 난 뒤에 얻은 감각이다. 농인들에게 나의 노래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내가 만든 노래를 손과 표정으로 직접 그릴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청사회와 농사회를 부지런히 오가는 말과 글과 노래를 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 노래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 가슴에 품었던 문장을 이렇게 바꿔 적고 싶다. ‘세상은 들을 수 없는 떨림으로도 가득하다.’ 들을 수 없는 이들에게도 떨림이 될 음악을 상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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