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서 심상정에게 바라는 것

정제혁 사회부장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고 했다.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은 근래 펴낸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이라는 책에서 이 말을 인용하면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놓인 공백기의 주요한 특징은 불확실성이다. 넓은 강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고 덧붙인다. “오래된 강물이 뒤에 있지만 반대편은 아직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물살 때문에 뒤로 밀려서 빠져죽을 위험도 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짓눌린다”는 것이다.

서순은 위기에 빠진 세계상을 개괄하면서 그람시의 이 유명한 고찰을 제사(題詞)로 썼는데, 이 문구는 한국의 진보정당, 특히 정의당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정의당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1987년 이후 성장한 노동운동, 제도권 정당 바깥에 있던 진보운동의 역량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진보정당 운동의 외길을 걸은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있었다. 진보정치의 꿈을 놓지 않고 살던 여러 분야의 인재들이 이 가난한 당에 몰려들었다. 노동·평화·생태라는 가치 중심은 확고했고, 기성 정당과 비교해 도덕적 우위는 확연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정의당(민노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폐기한 지 오래이고, 기득권화한 노동운동, 관성화한 노동운동은 다수가 불안정 노동자인 시민과의 접점을 상실했다. 민노당의 전성기를 일군 당직자들은 상당수 여권에 흡수됐다. 정의당과 진보적 의제 형성에 어깨를 겯던 일부 시민단체는 현 정부에서 관변단체화했다. 조국 사태 이후 진보의 도덕적 우위는 농담이 돼 버렸고, 정의당도 이런 세간의 시선에서 한묶음으로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은 파편화·분절화하면서 녹아내리는 중이고, 현실로 닥친 기후위기는 사는 방식의 근본적인 재조직을 요구한다.

요컨대 정의당을 떠받치던 옛 토대는 무너졌으나 새 토대는 구축되지 않았다. 정의당이 터 잡은 옛 질서는 무너지고 있으나 대안은 흐릿하다. 세계적인 흐름이고 한국의 다른 정당도 예외가 아니겠으나 원내정당 중 이념 지향, 가치 지향이 강하고 당세가 약한 정의당에 위기는 특히 가혹하다. 정의당이 지향하는 가치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여성 혐오, 평등에 대한 반감, 능력주의에 대한 선호 따위가 위기의 병적 징후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덕적 혼돈의 시대, 탈가치의 시대는 그 자체로 진보정당의 존립을 위협한다. ‘원칙의 포기냐, 죽음이냐’라는 선택지를 강요받기 십상이다. 거기서 중심을 잃고 낙마한 것이 조국 사태 때 정의당의 모습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근본을 생각해야 한다. 루카치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환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했다. 고 노회찬의 ‘6411 정신’은 근본을 잃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정의당 대선 후보 심상정은 얼마 전 선거운동을 재개하며 “가난하고 절박한 시민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더 절실해지겠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정의당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별이 빛나는 창공’이요, ‘별빛’인 셈이다.

가치와 시대정신이 실종된 참으로 천박한 대선이 펼쳐지고 있다. 여야 후보인 이재명과 윤석열은 부동산, 청년, 복지 정책 등에서 서로의 정책을 추격 매수하듯, 도박판에서 판돈 올리듯 베끼는 중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세상의 꼴이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러니 다른 데서 격렬하게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유례없이 지저분한 네거티브 선거, 내전에 가까운 정쟁의 본질이다. ‘형수 욕설’과 ‘김건희 녹취록’이 최대 쟁점인 이유이다. 이런 대선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겠는가.

적어도 심상정은 가치와 시대정신을, 새로운 세상에 관한 큰 이야기를,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기 바란다. 옹호할 것은 단호하게 옹호하고 비판할 것은 가차 없이 비판하며 소란스럽게 논쟁을 주도하기 바란다. 그것 자체로 대선의 품격을 높이는 공익적 기여이자 돋보이는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제인가 ‘별의 순간’이 도둑처럼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람시가 위기론을 쓴 것은 시대의 병적 징후들이 진보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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