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호 대학살과 윤석열차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2014년 2월 충북 옥천군으로 이사했을 때는 서울역을 떠나는 막차 시간이 밤 10시55분이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일을 보고 사람들과 술도 한잔 하며 아쉬움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이나 인간관계가 수도권에 있었지만 이주를 결심할 수 있었던 건 다닐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옥천역에 내려 인기척 없는 밤길을 걷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그런데 2017년 7월, 대전역 도착 시간이 늦다는 괴상한 이유로 서울역을 떠나는 막차 시간이 밤 9시50분으로 당겨졌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 1차만 마시고 가자는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2019년 12월에는 막차 시간이 오후 7시49분이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코레일은 철도작업을 위해 막차 시간을 조정한 것이라 설명했지만 정말 대체수단이 없었을까. 이때부터는 술 한잔 하려면 KTX를 타고 대전역에 내려 먼저 떠난 무궁화호로 갈아타야 했다.

2021년 12월28일부터는 막차 시간이 오후 5시31분으로 당겨졌다. 이제는 꼭 서울만이 아니라 대전이나 인근 지역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던 사람들의 마음도 바빠졌다. 코레일은 대구차량사업소 개량 공사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이를 수긍하는 주민들은 적었다. 이제 서울 일을 어떻게 보냐고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코레일은 KTX를 타고 대전에서 환승하라고 답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조금 더 머물 수 있지만 환승하느라 기다리는 시간에 두 배 이상 늘어난 기차요금은 어쩔 것인가. 이제 대중교통이 편한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나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윤석열차는 공공성 소멸의 전조

옥천만의 문제도 아니다. 전남 순천에서 출발해 보성, 화순 등을 거쳐 용산역으로 가던 무궁화호도 완전히 사라졌다. 작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 8월까지 전체 편성의 36%에 달하는 주중 44편, 주말 50편의 무궁화호 운행이 중단되었다. 한때 전체 운행 열차의 절반을 차지했던 무궁화호가 2010년부터 꾸준히 줄어들어 지금에 이르렀으니 대학살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대신 통근열차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대도시 인근의 일이고 관건은 수익성이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는 판국에 그나마 저렴하게 오갈 방법을 줄이면서 지방소멸을 막겠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균형발전을 한다며 쓸데없는 시설들에 예산을 쏟아붓는 것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편의를 보장해야 할 텐데, 그런 고민을 하는 정치인은 보이지 않는다.

열차가 서지 않으면 기차역이 사라지고, 기차역이 사라지면 그 주변의 상권이 붕괴한다. 그러면 그곳을 재개발이나 도시재생을 한다며 요란을 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정작 주민들에게 별다른 혜택이 없다. 무궁화호의 사라짐과 지역경제의 쇠퇴가 무관할까.

더구나 철도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탄소중립을 실현할 중요한 수단이다. 유럽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도로와 항공 통행량을 철도로 전환하는 교통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전국에 공항을 늘리고 열차 노선을 줄이고 자가용을 타라는 한국 정치인들의 공약은 시대에 맞는 대안일까? 문재인 정부가 공약했던 KTX와 SRT의 통합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2022년 정부 예산에서도 늘어난 건 공항과 도로 예산이다.

이 와중에 국민의힘은 ‘윤석열차’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평소 방문하기 어려운 지방의 중소도시를 무궁화호로 방문한다는데 전세차량을 빌렸다고 한다. 일반 편성된 무궁화호를 타야 철도로 전국을 도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텐데 아쉬운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용하는 노선도 운행 효율성과 수익성 악화를 빌미로 사라지는 판국에 별도로 전세차량을 허가받은 건 공정한 일인가?

열차 줄이면서 지방소멸 막겠다니

윤석열 후보가 무궁화호를 타고 전국을 돈다고 그 열차가 부활할 것 같지는 않다. 윤 후보가 무궁화호의 속도에 만족하며 조금 더 느린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과연 윤 후보는 무궁화호가 멈춘 곳에서 지역 간 공공교통을 되살리겠다고 공약할까? 공약인 충청내륙철도, 중부권 동서횡단철도를 다니는 열차는 무궁화호가 되고 공공교통이 강화될까?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이란 책에서 부르주아가 기르던 고양이를 재판하고 교수형시킨 노동자들의 행동에서 혁명의 기운을 감지했다. 나는 정권교체의 경적만 울리며 달릴 윤석열차에서 공공성 소멸의 전조를 본다. 나만 안타까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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