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희망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대선과 사회운동에 관한 고민을 나누는 집담회가 있었다. 서른 명 남짓 활동가들이 모여 토론을 했다. “운동이 망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말해놓고 내가 놀랐다. 나는 지금껏 운동이 망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활동가들이 머리로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 내뱉는 말이 ‘운동이 망했다’는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깨달았다. 나는 지금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아서 막막하고 때로는 화가 나고, 조금 자주 지치고 있구나.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어떤 대선도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다. 사실 선거는 환상이다. 서로 다른 정당이 자신의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며 격렬하게 그러나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전망을 실현할 수 있는 주요 정책들을 내세우며 사람들이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게 하고, 평소 정치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이며 미래를 선택한다? 이런 선거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흐르는 방향을 보면서 선거 이후의 사회를 예측해보기에는 충분했다. 시대정신이라 부를 법한 정동이 확인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이재명’. ‘내가 행복해지는 내일 윤석열’. 두 후보의 이름을 바꿔도 어색하지 않고 후보의 이름 외에는 아무런 의미값도 없다. 정치적 수사나 기만일 뿐이라도 나와 모두를 연결시키는 일이 정치의 몫인데 정치의 실패만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미 모두가 나를 위해, 내가 행복해지는 내일을 위해 애쓰며 산다. 배반당하는 줄 알면서도 열심히 일을 하고, 불안해서 빚을 지고 투자를 하고, 다시 불안해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하지만 기후위기와 재난에 압도당하고, 당장 먹고살 걱정에 모욕과 차별까지 견디면서. 진보정당들이라고 이런 수고로움에 응답하는지 묻는다면, 아직은 확신이 없다.

시대정신을 공유할 사회 자체가 사라진 시대에 사회운동도 책임이 있다. 사회운동은 의제를 던지고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힘은 정책대안이 아니라 희망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해보자고, 가보자고 약속하는 사람들의 조직에 있었다. 그게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의 의제와 정책을 들고 국회와 정부를 찾아다니는 동안 조직들이 무력해졌다. 서로 다른 조직이 연결되는 자리는 드물어졌고 그만큼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와 새로운 전망을 틔울 가능성도 희미해졌다. 그런데 정말 보이지 않는가.

나는 요즘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기 유세단’ 활동을 한다.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만난다. 아이가 장애인이라 이해해달라는 말을 덜 하고 싶다, 직장을 구할 때 여자를 뽑을지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일지 먼저 묻고 싶다는 이야기들이 내게로 스민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이유는 점점 더 사소해지고 그만큼 간절해진다. 누군가 이 사소한 희망들을 엮어 ‘내가 나여도 안전한 나라’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포갠다. 함께 내일을 그릴수록 우리는 유권자 아닌 주권자가 되어간다. 내게 보이는 것은 참 사소해서 사소하지가 않다. 나는 이제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을 인정하는 대신 냉소는 버리기로 했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탈시설장애인당, 돌봄휴가를 넘어 모든 노동자에게 연차유급휴가를 확대하라는 여성단체, 청년공약을 기웃거리는 대신 직접 대안을 만들겠다고 서로 만나고 배우는 청년들, 그린워싱에 전선을 긋고 체제 전환으로 나아가자는 기후정의동맹, 노동자 정치가 사라진 현장에 다시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스스로를 믿는 용기, 서로 동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내는 이들과 함께 전망을 조직해야겠다.

그래서 누구를 찍으라는 것이냐는 질문에 답 없음을 정직하게 고백하니 답 없는 질문만 강요받는 시대를 바꿀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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