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담긴 속담들

오은 시인

틈나는 대로 국어사전을 펼친다. 글이 무섭게 잘 풀릴 때나 글이 도무지 안 풀릴 때, 시간을 채우고 싶을 때나 시간을 죽이고 싶을 때,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어김없이 국어사전을 펼친다. 아무 때나 펼치는 셈이다. 숨을 참고 있을 때조차 공기가 있는 것처럼, 잊은 줄로만 알았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처럼, 그것은 언제든 열어볼 수 있게 내 침대 옆에 놓여 있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단어를 익힐 때 나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일단 단어의 뜻 살피기. 아는 단어는 재확인의 과정이 필요하다. 단어의 첫 뜻만 아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다양한 뜻을 한 가지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놀라다’의 뜻이 네 가지나 된다는 걸 알았다. 무서울 때나 감동할 때나 기가 막힐 때나 신체의 어떤 부위가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일 때 쓰는 단어일 텐데, 지금까지 그것을 뭉뚱그려 한 가지 뜻으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뜻과 실제 단어의 뜻이 다르면 무람해진다. 말문이 막히지만 머릿속으로는 실제 뜻을 계속해서 굴리고 있다. 잊지 말아야지, 제대로 써먹어야지 다짐하면서. 모르는 단어를 발견하면 그것을 몸에 새기려고 애쓴다. 두 번째 여정인 예문 읽기가 도움이 된다. 단어의 용례를 파악하는 데 이만한 방법은 없다. 그것은 국어사전에 붙박인 단어를 현장의 맥락 안에 자리 잡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맥락’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 뜻도 최근에 처음 알았다. “혈관이 서로 연락되어 있는 계통”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두 번째 뜻인 ‘관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여기에 한 가지 루틴이 추가되었다. 해당 단어가 들어간 관용어와 속담을 읽는 일이다. 말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물론, 예전부터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작은 ‘좁쌀’이었다. 나는 쌀 앞의 ‘좁’이 당연히 접두어라고 생각했고 이를 정확히 알고 싶어 사전을 펼쳤다. 내가 알고 있던 단어의 뜻은 두 번째 것이었다. “작고 좀스러운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말이다. 첫 번째 뜻은 “조의 열매를 찧은 쌀”이었다. 얼굴이 발개졌다.

무심히 하단의 속담·관용구 부분을 살피는데, 거기서 발견한 속담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좁쌀 썰어 먹을 놈.” 싱거운 웃음이 피식 나왔다. 좀스러운 사람을 비꼬는 속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으라고 배웠는데, 좁쌀이라고 나눠 먹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뒤로 속담과 관용구를 통해 옛날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것을 현재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생겨났다. 속담은 뜻을 헤아리는 순간,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그것은 속에 절로 담겼다.

얼마 전에는 식혜의 어원을 알아보고자 국어사전을 펼쳤다. 거기서 “식혜 먹은 고양이 속”이라는 속담을 만났다. “죄를 짓고 그것이 탄로 날까 봐 근심하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안절부절못하는 고양이의 표정이 그려져 웃음이 나왔다. 누룽지와 눌은밥의 차이를 알기 위해 ‘누룽지’를 찾았을 때는 “평생소원이 누룽지”라는 속담을 맞닥뜨렸다. 평생 어디 들러붙겠다는 태도를 풍자하는 것일까 짐작했지만 실제 뜻은 “기껏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하찮은 것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평생소원’이 한 단어라 붙여 쓴다는 사실은 덤으로 알았다.

속담을 속에 담는 일은 ‘예로부터’를 ‘지금까지’로 연결하는 일이다. 속담을 지칭하는 데 걸맞은 속담은 “속에 뼈 있는 소리”일 것이다. 물론 어떤 뼈는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는 기존의 속담을 뒤집어 새로운 말을 상상해야 한다. 겉을 훑어보는 대신, 속을 톺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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