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를 1.5배속으로 본다면

백승찬 문화부 차장
<드라이브 마이 카> 한 장면. 트리플픽쳐스 제공

<드라이브 마이 카> 한 장면. 트리플픽쳐스 제공

2019년 넷플릭스가 영상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테스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창작자들이 비판을 쏟아냈다. 넷플릭스 시리즈 <러브>의 감독 저드 애퍼타우는 “내가 아는 모든 감독과 창작자에게 연락해 같이 싸우자고 말하게 하지 말아달라. (…) 영상을 애초 의도된 대로 볼 수 있게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브레이킹 배드>의 배우 에런 폴은 “속도조절 기능은 넷플릭스가 다른 사람의 예술을 장악하고 파괴할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감독 피터 램지는 “가장 게으르고 취향 없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이 설계돼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백승찬 문화부 차장

이듬해 넷플릭스는 속도조절 기능을 정식으로 도입했다. 넷플릭스는 자막을 천천히 보기 원하는 청각장애인, 빠른 속도로 듣는 데 익숙한 시각장애인을 위해 도입한 기능이라고 설명했다. 넷플릭스는 “창작자들의 우려를 염두에 둬 재생속도의 범위를 제한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유튜브는 0.25~2배속으로 조절할 수 있지만 넷플릭스 영상의 속도조절 범위는 0.5~1.5배속이다.

넷플릭스의 속도조절 기능은 1년 사이 비장애인에게도 널리 애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조차 장애인들만 속도조절 기능을 사용할 것이라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 강의를 빠른 속도로 듣는 데 익숙한 청년세대는 드라마도 1.5배로 보곤 한다. <오징어 게임>의 모든 에피소드를 보는 데는 8시간여가 걸리지만, 1.5배속으로는 5시간 만에 볼 수 있다.

온갖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종편, 지상파에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들을 쏟아낸다. 어떤 콘텐츠는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한다. 일상의 화제에 끼거나 호기심을 해소하고는 싶지만 <오징어 게임>의 9개 에피소드, <지옥>의 6개 에피소드, <솔로 지옥>의 8개 에피소드를 정속으로 볼 시간은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도 자연스럽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한 드라마의 일부를 1.5배속으로 시청해보았다. 배우의 대사가 조금 우스꽝스럽게 들렸지만, 자막을 켜니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줄거리를 이해하면 영화를 이해하는 걸까. 각광받는 일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영시간이 3시간에 육박하지만 줄거리는 간단하다. 정리하면 이렇다. 아내를 갑자기 여읜 중년의 남성 연극연출가 가후쿠가 체호프의 연극을 연출해 무대에 올린다. 연극제에서 배정해준 젊은 여성 운전기사 미사키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운전해준다.

영화는 형식적으로도 간결하다. 배우를 캐스팅해 함께 연습하고 무대에 올리는 모습을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보여준다. 오래된 사브 자동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별다른 테크닉 없이 찍는다. 이렇게 단순하고 최소화된 매 시퀀스들이 관객의 호흡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가후쿠가 자동차 뒷자리에 앉는지 조수석에 앉는지 조율하는 것만으로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 변화를 묘사한다. 차 안에서 처음으로 같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엄청난 사건이다. 인물들이 조용히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보듬으며 힘겹게 삶의 의지를 다질 때, 관객 역시 온전히 그들 삶의 일부를 체험한다. 1.5배 아니라 2배속으로 봐도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 영화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는 등장인물이 겪는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 겪어내는 사람에게만 감흥의 문을 열어준다. 팬데믹으로 움츠러든 극장가 상황 속에서 이 영화는 개봉 1개월 만에 4만여 관객을 모으는 흥행 성적을 올리고 있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처음엔 서먹하다. 가후쿠는 차 안에서 아내가 생전 녹음해둔 대본을 듣고, 미사키는 묵묵히 운전만 한다. 연극을 준비하고 같은 자동차에 머물고 한 배우의 저녁식사에 초대받는 등 별스럽지 않은 일들을 함께 겪으면서 둘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한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마음을 쓴다는 것이며, 어떤 관계는 충분한 시간을 들였을 때만 가능하다. 물론 시간을 들이고 보니 투입된 시간이 아까워지는 일들도 있다. 그런 시간조차 다음 실패를 피하고 감식안을 다듬는 데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완전한 낭비는 아니다.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