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너는 달빛의 아이란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어머니는 종종 이야기했다. 늑대 울음 같은 바람이 초원을 휘감고 지나가는 밤이었지. 게르의 천장 틈새로 보름의 달빛이 흘러들어 홀로 잠든 나의 배를 어루만졌어. 달빛은 마른 땅에 내린 빗물처럼 스며들었지. 동틀 무렵까지 환한 빛이 곁에 머물렀어. 얼마 뒤 보름달처럼 배가 부풀었고 네가 태어난 거야. 1)

아이는 바람처럼 떠돌고자 했으나,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병든 어머니를 살릴 약초를 찾으러 떠나거나,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하며 떠나거나. 하지만 어머니는 늑대처럼 강인했고, 달빛은 사그라들었다가도 되살아나곤 했다.

아이는 홀로 초원에 섰다. 먼 곳에서부터 풀이 눕기 시작했다. 몰아치는 바람을 마주 바라보자, 눈동자가 베인 듯 아팠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다가 아이는 손등 위에서 금빛 모래알을 발견했다. 반짝이는 것이 아픔인가. 아이는 궁금했다. 떠날 이유가 온 것이다. 아픔이 비롯된 곳으로 가자.

아이는 바람을 거슬러 걸었다. 초원을 가로질러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가시덤불이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 아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나운 짐승이 나타날 거야.” 아이는 가시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눈에서 푸른 불꽃을 뿜는 짐승이 나타났다. 아이가 몸을 떨자 가시덤불도 흔들렸다. 짐승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갈 길로 갔다.

“나는 원래 999개의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였어.” 가시덤불이 속삭였다. “나의 주인은 천 명의 목숨을 빼앗아 천 개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려 했지. 하지만 천 번째 만난 사람을 아무리 뒤쫓아도 잡을 수 없었어. 멈추라고 주인이 소리치자 잡을 수 없는 그 사람이 대답했어. ‘나는 언제나 여기에 멈추어 있다. 멈출 줄 모르는 것은 네가 아니냐?’ 그 순간 주인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멈추게 되었지.” 2)

아이는 험한 산을 넘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가다가 화톳불이 일렁이는 강가에 다다랐다. 불꽃이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천 개의 머리를 가진 마왕에게 납치되었던 왕비의 순결을 시험할 거라고 하지. 하지만 내가 정말로 시험하는 것은 왕의 사랑이야.” 왕이 왕비를 불 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구경꾼들 틈에서 아이는 왕비가 불 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땅이 가슴을 열어 왕비를 품었다. 왕비의 머리카락 한 올도 그을리지 않았다. 3)

아이는 청년이 되어 사막에 이르렀다. 바람이 순식간에 모래의 산을 옮기는 곳이었다. 바람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었고, 청년은 발목까지 빠지는 모래 속에서 헤매었다. 목마름과 허기에 시달리며 걷고 있는데 눈앞에 화려한 성이 나타났다. 푸른 야자수와 맑은 물, 진수성찬과 아름다운 사람들이 청년을 맞이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 어느 날 성의 주인이 청년을 탑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달빛의 아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도 영원히 살 수 있어.” 주인의 권유를 뿌리치자 신기루가 사라졌다. 청년은 바람에 맞서 사십 일 밤낮을 헤맸다. 모래 폭풍이 덮쳐올 때, 청년은 아픔의 바다 한가운데 있음을 깨달았다. 네 것이 아닌 아픔이 더 반짝이는 거란다. 바람이 속삭였다.

초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바람을 따르는 길이었다. 노인이 된 청년은 높은 곳에 오를 때마다 몸에 새겨진 이야기를 깃발에 적어 매달았다. 바람의 갈기가 오색으로 펄럭이며 외쳤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가장 빨리 달리는 말보다 바람이 빠르던 시절이었다.

번개는 바람보다 빠르다. 사람들은 번개를 사로잡아서 부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야기는 번개의 길을 따라 흘러 다닌다. 모래에서 뽑아낸 금속의 얇은 막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이야기를 퍼뜨린다. 사막에 가지 않아도 신기루를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새겨진 몸도, 바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1)<몽골 비사>, 2)<앙굴리말라경>, 3)<라마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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