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부 폐지의 반대말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성평등을 위해서는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윤석열 당선인의 여성가족부 폐지 고집은 한때 유행했던 광고 문구를 떠올리게 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여가부가 파견한 공무원은 받지 않았고 업무보고는 30분 만에 끝냈다. 이미 없는 부처로 취급하는 수준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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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실현을 위해 전담 부처가 필요하다는 점은 국제사회에서 상식이다. ‘역사적 소명’을 다해 축하받으며 전담 기구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제 겨우 20년을 넘긴 여가부가 소명을 다했을 리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심경이 복잡했다. 막무가내로 몰아가는 이 정부와 싸워야겠는데, 여가부를 지키고 싶냐면 마음이 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가부는 성평등을 실현하기보다 왜곡하는 부처에 가까웠다. 2015년부터 정책 이념이 된 양성평등도 그랬다. 남성들의 역차별 주장을 회피하고픈 ‘양성평등’에 성소수자를 배제하자는 ‘양성평등’까지 포개져 성평등을 허물어뜨렸다. 보수적 성 담론을 확산하는 성교육 표준안이 만들어지고, 일·가정 양립정책은 저출산대책의 틀 안에서만 강화되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다르면서 같았다. 여가부는 낙태죄 폐지에 굼떴고 ‘나다움어린이책’을 회수할 때는 날랬다.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 대신 나다움을 찾아갈 권리가 회수되었다. 여성폭력 피해 지원은 강화하려고 했는데 서울시장 위력성폭력사건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했다. 여가부가 여성 편만 든다며 폐지하자는 이들은 들으시라. 여가부는 설치 이래 정부의 편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실패가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세간의 평가는 성평등에 관해서 더욱 옳다. 앞선 정부들의 성평등 왜곡을 답습한 결과가 ‘윤석열’이다. 정치의 실패도 기막히다. 제대로 못했으면 더 잘할 정치가 등장해야 하는데 더 안 하겠다는 자들의 목소리만 굉굉하다. 그러면 하던 만큼만이라도 하게 해달라 매달릴 줄 알았나.

‘여가부 폐지’에 맞서는 일은 정부조직 개편 반대에 그칠 수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더욱 긴요해졌다. 차별을 두루 살펴야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돌봐야 하는 상황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아야 하고 어떤 일을 하든 무시당하지 않아야 한다.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하건 하지 않건, 어떤 가족형태로 살아가건, 차별을 당한 여성이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가정 양립 지원이든 한부모·다문화가족 지원이든 저출산대책에 갇혀 일도 가정도 충실하라는 여성억압이 될 뿐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의 시급성을 특별히 강조하며 권고한 데는 이유가 있다. 여성폭력 피해자가 찾아갈 곳은 있지만 피해자가 되기 전에 차별에 맞서 싸우려는 여성들은 찾아갈 곳이 없다. ‘경력단절’ 여성은 지원받을 수 있지만 경력이 단절되지 않게 할 방법은 찾기 어렵다. 여성들은 차별에 맞서 언제나 싸워왔지만, 번번이 같은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성평등 가치가 활성화된 사회는 당연하게도, 차별을 더 잘 알아차리기 위한 차별금지법을 갖추고 있다. 차별을 알아야 평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차별을 따져볼 기준들이 쌓여가면 사회는 차별하지 않을 방법들을 찾게 된다. 차별을 예방할 방안을 만들다 보면 평등을 당겨올 방안도 보인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에 ‘있다’는 말만 되돌려주긴 섭섭하다. 성차별 구조의 아랫돌을 하나하나 부수면서 가야 한다. 여가부 폐지의 반대말은 여가부 수호가 아니라 성차별 폐지다. 여가부를 지켜 성평등이 오는 것이 아니라 성차별에 맞서 싸울 때 성평등을 위해 일 잘하는 여가부가 올 것이다. 한결같이 거침없이, 성평등으로 직진하자. 윤석열 덕분에 나는 더 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많은 걸 해왔지만 더 격렬하게, 차별금지법 제정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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