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봄은 왔건만 봄 같지가 않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이 글귀의 출처는 한나라 시대 궁녀 왕소군을 두고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지은 시다. 화친의 증표로 흉노의 왕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시 ‘소군원(昭君怨)’에 나온다.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외견상 고국을 떠난 한 여인의 원한을 달래고 있으나 배경은 전쟁의 아픔이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이 왔건만 진짜 봄은 온 건가. 마침 춘래불사춘이란 시구를 떠올리니 봄 같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역만리 우크라이나의 전쟁 상황이 중첩된다.

습관적으로 외국 방송을 틀어놓고 있다 보면, 전쟁이 할퀸 우크라이나의 참화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다. 국내 언론 소식으로 접할 수 없는 엄청난 참상을 통해 전쟁의 비애를 절감한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부차에서 수백명이 집단학살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TV 화면으로 검은 비닐에 담긴 즐비한 시신들을 보니 전율과 공포가 엄습했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 세계 예술계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전쟁을 촉발한 러시아 관련 예술가들의 퇴출과 공연 보이콧이 줄을 이었다. 삽시간에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는 연주와 공연, 위로의 메시지가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며 퍼져나갔다. 세계 정상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소프라노 박혜상도 여기에 동참했다. 지난달 말 리사이틀이 고양 아람음악당에서 열렸다.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몇 곡을 부른 다음 박혜상은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병사들과 국민들을 위해 이 곡을 바친다”며 우크라이나로 관심을 돌렸다.

잠시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들을 위로하는 노래로 박혜상이 바친 ‘이 곡’은 헨리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이아스> 중 ‘내가 대지에 묻힐 때’다. 연인인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를 떠나보내며 슬픔과 절망에 빠진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죽음 직전 탄식하며 부르는 노래다. 박혜상의 청아한 목소리에 담긴 아리아는 죽어서 저 광활한 우크라이나의 대지에 묻히는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애가(哀歌)로 들렸다. 애절한 사랑노래가 위로와 치유의 음악으로 변주되는 뭉클한 순간을 경험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바구니’로 불리는 세계적인 곡창지대이며 유서 깊은 문화예술의 강국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등 음악가들과 전설적인 발레리노 겸 안무가인 바츨라프 니진스키, 아방가르드 회화의 창시자인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이 이 나라 태생이다.

음반이나 유튜브를 통해 이들 명연주자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재미와 흥분도 좋지만, 내가 특히 관심 있는 예술가는 니진스키다. 1890년 수도 키이우에서 태어난 니진스키는 현대발레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를 기점으로 고전발레와 현대발레가 구분된다는 점에서 ‘발레 혁명가’로 불린다.

그 구분선을 명확히 획정한 작품이 1913년 파리 샹젤리제극장에서 초연한 <봄의 제전>이다. 같은 제목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이 발레에서 출발했다. 니진스키가 대본과 안무를 맡은 <봄의 제전>의 초연은 야유와 고성이 난무하는 난장판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거친 불협화음과 비트의 음악은 소음 같다고 외면받았고, 남녀 무용수가 뒤엉킨 춤은 동물적이며 역겨운 외설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봄의 제전’이 아니라 ‘봄의 학살’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 공연이 진행되면서 극단적 평가는 잦아들었지만 니진스키는 무용가로서의 명성을 점점 잃어간다.

니진스키의 이런 파격적인 실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모더니즘 탄생의 미학적 근거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성과 합리성이 사라지고 욕망이 들끓는 <봄의 제전>처럼 전쟁의 광기가 유럽을 지배하게 된 것, 그래서 무고한 사람들이 전쟁 제물이 되었다는 것에서 그렇게 본다(<봄의 제전>,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전쟁에 휘말린 우크라이나와 니진스키, <봄의 제전>을 연결해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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