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위원장님, PDF 제발 좀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대선 후보일 때였다. 지난 2월21일 3차 TV토론이었다. 안철수 후보는 윤석열 후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우리는 국가 데이터 공개에서 굉장히 많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공무원분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절대로 공개를 하지 않습니다.”

“차기 정부에 가장 중요한 국정운영 목표 중에 하나가 사실 공공 데이터 공개라고 믿고 있는 입장이라서 제가 윤 후보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이런 문제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신 것 같아서 그 점이 우려가 돼서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빌 제임스는 야구 통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식품창고 경비원이었던 그는 신문에 나온 경기 결과를 연필로 적어가며 계산해 혁신적인 새 야구 기록을 여럿 발명했다. 더 나은 분석을 위해 메이저리그 공식 기록업체 엘리아스 스포츠 뷰로에 경기 세부 기록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야구팬들에게 호소했다. “우리가 직접 야구를 기록합시다.” 미국 전역의 야구팬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경기장에 가서 직접 기록했고,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했다. 투수땅볼은 13, 유격수 병살타는 643, 1루수 실책은 E3으로 적는 식이다. 일명 ‘기록지 프로젝트’. 1984년의 일이다.

기록이 분석 가능한 데이터로 바뀌는 순간 ‘혁명’이 일어났다. 타자의 타율, 투수의 승리는 기록이 아니라 ‘인상’에 가깝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뛰어난 선수’로 알려진 선수들이 실제로는 ‘영양가’가 별로 없었다. ‘희생’의 상징인 ‘번트’는 생각보다 덜 효율적이었다. 데이터는 야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데이터 공개는 권력 해체 불러와

30년 뒤 2014년 메이저리그는 스탯캐스트라는 투구, 타구 추적 시스템을 전 구장에 설치했다. ‘눈’으로는 알 수 없던 기록이 한 경기당 3테라바이트의 데이터로 쌓였다. 이를 모두에게 공개했다. 수많은 이들이 달려들어 분석하고 뜯어 살폈다. 타구 속도와 발사 각도 사이의 상관관계가 승리 확률을 높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재야의 전문가들이 ‘과외’ 형태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스윙을 바꿨다. 야구계는 이를 두고 ‘뜬공 혁명’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다시 투수들이 데이터로 무장하며 타자들의 빈틈을 공략하는 중이다.

빅데이터가 세상을 나아지게 한다는, 뻔하고 한가한 얘기가 아니다. 야구 데이터 혁명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숨어 있다. 이전까지 야구는 ‘야구인’들의 영역이었다. 오래 야구한 경험과 감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야구 해봤어?”라는 말은 도그마로 작동했다. “스윙이 별로네” “공 끝이 안 좋아”라는 말로 선수를 평가했다. 분석 가능한 데이터가 쌓이자 신화는 무너졌다. 덩치가 큰, 야구 잘하게 생긴, 상위 지명된, 어느 학교를 나온, 누구의 아들(또는 조카) 어쩌고 하는 수식어는 데이터 앞에서 무용지물이 됐다. 데이터는 막연한 ‘능력’을 검증했고, 야구를 해보지 않은 이들의 다른 시선이 야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독재자’로 비유됐던 야구 감독의 권위도 사라졌다. 지금 야구 감독은 선수를 병사처럼 부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이들이 아니라 선수의 힘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리더의 역할로 규정된다. 데이터의 공개는 권력을 해체한다.

해마다 3월 말이면 고위공직자 재산 변동 사항이 공개된다. 공개 자체는 의미가 있지만 여전히 전자관보 누리집을 통한 PDF 형식이다. 분석 가능 데이터로 변환하려면 1984년 기록지 프로젝트 수준의 고생과 노력이 동원돼야 한다. 게다가 지방자치단체마다 형식도 다르다. 공개는 됐지만 ‘데이터’라고 볼 수 없다. 인사혁신처 보도자료에 ‘평균’ 관련 내용이 있는 걸 보면 ‘데이터’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굳이 PDF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안 위원장의 후보 시절 말대로 “공무원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원 데이터 공개는 일도 아닐 텐데

야구가 그랬듯, 데이터의 공개는 권위를 해체한다. 새 정부의 국정방향과도 일맥상통한다. 집무실 이전, 인사 과정 등에서 보여준 전투력이라면 PDF 대신 원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스프레드 시트, CSV, SQL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XML이나 JSON 형태라도 좋다. 데이터의 효용을 잘 아는 안 위원장에게 부탁한다. PDF 좀, 제발 쫌. 데이터는 과거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초속 11.2㎞의 혁신을 만들 수 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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