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의 두 주연 로버트 드니로(좌)와 알 파치노.

<아이리시맨>의 두 주연 로버트 드니로(좌)와 알 파치노.

벤저민 프랭클린은 불투명한 현실 앞에서 허둥대는 사람을 위해 바람직한 전망 대신 현실적 조언을 많이 전했다. 사람의 본질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쉽게 이해시켜 회자되는 명언이 많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논리가 아니라 이득을 말해야 하며 세 사람 간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둘이 죽으면 된다고 노골적으로 설파했다. 그의 명언은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아이리시맨>은 장기 미제사건에서 영구 미제사건으로 바뀔 미국의 노조 활동가 지미 호파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다. 지미 호파는 탁월한 협상능력으로 트럭운전사 노조위원장으로 활약한 당대 비틀스에 버금가는 유명인이었다. 그의 권세는 마피아와 이권을 나누며 정치계와 연계돼 파행을 거듭하던 끝에 의문의 실종으로 마감되었다.

‘세 사람 간 비밀은 둘이 죽었을 때 지킬 수 있다’는 프랭클린의 불편한 명언은 주인공 프랭크 시런의 대사로 소환된다. 영화에서 지미 호파는 가장 믿었던 측근 프랭크 시런에 의해 쓰러진다. 적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멀고 얄팍한 관계에서 무너진 신뢰를 배신이라 여기지 않기에 배신에 있어 가장 믿을 만한 대상은 적이다. 둘도 없는 친구가 믿음을 저버렸을 때,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보다 애초에 친구가 아니었다는 자각은 쓰라리다. 배우자의 간통 사실은 가정이라는 소속감을 빼앗는다. 헛살았다는 자책과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자폐의 그늘에서 피폐해진다. 배신은 가까운 사이를 파괴하는 패륜이다.

일반적으로 배신을 사익을 위해 친구나 집단에 등을 돌린 비행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배신에 대한 판정은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기업비리를 폭로한 내부고발자를 해당 집단의 동료들은 배신자라 비난하지만 고발자는 사회정의라 믿는다. 배신은 중립적 입장에서 볼 때 생존에 유리한 합리적 행위지만 개인의 이득을 위해 마냥 허용한다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다.

무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서열이 체계화되고 집단의 규율을 내면화한 부족이 결속력이 강했을 것이다. 각자의 이익에 집착해 분열된 부족과의 싸움에서 우위에 섰을 것이다. 배신은 생존본능이어서 싹을 없앨 수 없었다. 처벌할 때마다 사회적 비용이 많이 발생해 머리 좋은 권력층은 배신을 윤리로 결박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았다. 충(忠)의 이데올로기 역시 배신하지 않겠다는 부하의 약속이며 배신의 폐해가 그만큼 높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어느 사회나 기득권의 카르텔은 공고하다. 이권을 나눠 먹는 최상위 집단일수록 싫어도 서로를 믿어야 한다. 두터운 관계는 암묵적 계약과 위태로운 경계의 허울일 뿐이다. 의심의 눈은 감을 수 없다. 간혹 배신자가 나타났을 때는 잔인하게 응징한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전시효과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조각에 대한 우려가 크다.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인 정호영씨는 윤 당선인과 대학 시절부터 40년간의 우정을 다져온 두터운 관계라 자랑했다. 윤 당선인 입장에 서면 탄탄한 의사 경력에 기왕이면 오랜 시간 믿고 의지한 친구를 곁에 두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 이해했다. 안타깝게도 정호영씨의 비리 의혹에 대한 비판 수위가 높아지자 윤 당선인 측에서는 40년 지기가 아니라 가끔 얼굴 보는 사이라 선을 그었다. 이 정도면 막연한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막역한 우정과는 거리가 멀다.

윤 당선인의 말대로라면 정호영씨는 대통령과 절친이라는 허언으로 장관직을 노린 파렴치한 아닌가. 윤 당선인 입장에서는 지연이 아닌 건실한 의사 경력을 믿어 인선했는데 허풍 떠는 후보자의 인격에 서둘러 신뢰를 거둬야 옳다. 만에 하나 정호영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쩌겠는가 정치가를 친구로 둔 자신을 탓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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