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말, 정치인의 말

최준영 책고집 대표

마음 둘 곳 없는 허망한 시절이다. 와중에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단비 같은 말이 있어 반가웠다. 누가 예상이라도 했을 것인가,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세월호 아이들의 이름이 흘러나올 줄을. 고 김용균씨와 고 변희수 하사, 고 박길래님의 이름이 소환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최준영 책고집 대표

최준영 책고집 대표

제58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조석봉 역으로 TV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조현철이 했던 수상 소감이 화제다. 수상 소감이 알려진 후 그의 남다른 가족사까지 큰 화제가 되었다. 조현철은 <전태일 평전>의 편저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고 조영래 변호사의 조카이며, 유신 시절 공해연구소를 만들어 환경운동에 씨를 뿌렸던 조중래 교수의 아들이다.

“그 영화를 준비하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에게 아주 중요했던 이름들, 박길래 선생님, 김용균군, 변희수 하사, 그리고 잠시만요, 기억이 안 나네요. 이경택군, 외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 그리고 세월호의 아이들. 나는 이들이 분명히 죽은 뒤에도 여기에 있다고 믿어….”

모처럼 사람의 말을 들으며 상념이 깊어졌던 걸까. 조영래 변호사 이름 뒤에 어김없이 따라붙는 고 김근태 의장의 말까지 떠올랐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던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내 친구 조영래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죽음’이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김근태는 생의 마지막까지도 정치인의 말 대신 사람의 말을 잊지 않았던 정치인이다.

사람들이 조현철의 수상 소감에 감응한 건 단지 그의 메시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에 더해,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과 상식을 송두리째 헤집고 있는 고위층과 지식인, 부유층의 일탈적이고 일그러진 모습과 대비되는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고위층과 지식인의 위선적인 행태에 몸서리쳐왔다. 정부는 바뀌었다지만 그러한 행태는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되레 더 노골적이고, 심지어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탈법과 불법을 일삼는다.

조국 전 장관을 비판하며 정치의 길로 들어섰던 새 대통령의 첫 인사를 보고 있노라면 기함할 정도다. 새 정부 고위층의 인사청문회가 지난 정권에 이어 또다시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학력과 지위의 세습에 몰두하는 그들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탈법과 불법을 넘나들면서도 반성이나 사과의 말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정권교체였던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정말이지 못 들어줄 것은 그러한 행태를 옹호하고 나선 정치인들이다. “저는 애초 조 전 장관이 대한민국의 초엘리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엘리트로서 그 초엘리트만의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굳이 불법이나 탈법이나 편법이 아니더라도 그 초엘리트들 사이 인간관계 등으로 일반 서민이 갖지 못한 어떤 관계들이 있다.” 최민희 전 의원의 말이다. “대한민국에 빈부격차가 엄연히 존재하고, 부모의 재력에 따라 교육을 받는 수준에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장관으로서의 결격사유가 될 수는 없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말이다.

사람의 말과 정치인의 말 사이에 이토록 높은 장벽이 쌓이고, 이리도 다른 문법을 갖게 된 현실이 가슴 아프다. 사람의 말, 사람냄새 나는 말 하나 소개해 본다. <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황풍년)에 나오는 왕대마을 윤순심 할매의 말이다.

“우리 손지가 공부허고 있으문 내가 말해. 아가,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다 도둑놈 되드라. 맘 공부를 해야 헌다. 인간 공부를 해야 헌다, 그러고 말해. 착실허니 살고 놈 속이지 말고 나 뼈 빠지게 벌어묵어라. 놈의 것 돌라 묵을라고 허지 말고 내 속에 든 것 지킴서 살아라. 사람은 속에 든 것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벱이니 내 마음을 지켜야제 돈 지키느라고 애쓰지 말아라.”


Today`s HOT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사해 근처 사막에 있는 탄도미사일 잔해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구의 날 맞아 쓰레기 줍는 봉사자들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한국에 1-0으로 패한 일본 폭우 내린 중국 광둥성 교내에 시위 텐트 친 컬럼비아대학 학생들 황폐해진 칸 유니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