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떤 ‘자유 시민?’

이일영 한신대 교수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앞길은 첩첩산중인데, 어떤 지도를 갖고 있는지 뚜렷하지 않다. 대통령 취임사에 대해서도 ‘독특했다’는 평가가 많다. 우선 발화의 상대가 국민, 재외동포, 세계시민이다. 반지성주의를 언급한 것도 화제였다. ‘자유’라는 단어는 35번 나오는데, ‘통합’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자유 시민’이라는 단어였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이일영 한신대 교수

우선 취임사에 등장하는 자유가 시장만능주의의 자유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번영과 풍요를 가져온다는 것은 제도를 중시하는 제도주의 경제학 전통의 논지이기도 하다. 자유가 결코 승자독식이 아니고 자유 시민의 기초임을 지적한 것은 자유를 규범적 가치에 근거한 적극적 자유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소극적 자유가 주로 19세기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논의되는 개념이라면, 자유 시민 개념은 자기완성을 위한 적극적 자유, 공화주의적 자유의 주체로 해석될 수 있다. 로마적·공화주의적 해석에 의하면, 자유는 노예와 구분되는 자유 시민의 상태이다. 자유 시민이 되려면, 불개입의 상태에서 나아가 비지배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예측 가능한 법의 지배에서, 그리고 일정한 경제적 기초 위에서, 비지배의 자유는 실현되는 것이다.

자유 시민에게는 시민적 덕성이 필수적이다. 로마 전통에서는 절제, 평정심, 강건함, 정의 등이 공화국 시민의 덕성이었다. 서구 근대가 형성되면서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민적 애국주의가 핵심적 덕목이 되었다. 공화주의 맥락에서 애국심은 자유와 정의가 살아있는 조국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시민적 덕성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자유 시민의 시민적 덕성은 르네상스 시기의 공화국, 그리고 영국 시민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윤 대통령이 평소 사용하는 자유 개념에는 소극적 자유와 공화주의적 자유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취임사에서는 주로 시민적 자유 개념이 전개되고 있다. 일정 수준의 경제적 기초와 공정한 교육과 문화의 접근 기회 등을 자유 시민에 필요한 조건으로, 규칙의 준수와 연대·박애의 정신을 시민적 덕성으로 이야기했다. “국민 모두 힘을 합쳐, 세계 시민과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양극화와 사회 갈등이 공동체를 위협한다는 인식도 공화주의 맥락의 인식이다.

그런데 취임사가 실천방향을 명료하게 드러내주지는 않는다. 현실 인식이 치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명문으로 평가받는 문건들은 절박한 현실 인식이 기초가 되어 있다. 영국의 권리장전은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열거한 후 시민과 의회의 권리를 선언했다. 미국 독립선언은 영국 국왕의 역사에서 악행과 착취로 인한 고통을 열거한 후 정부를 변혁해야 할 필요성을 선언했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가 힘을 얻으려면,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곧바로 반지성주의로 규정하기 앞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구조적 현실을 좀 더 심각하게 다루어야 했다. 그래야 새 정부의 핵심 과제가 무엇이고 자유 시민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가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통합은 너무 당연”해서 취임사에서 빠졌다는 해명도 필요가 없다. 취임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약과 성장 없이는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총량적 성장만으로 양극화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구조적 격차의 현실을 직시해야 생동감 있는 해법을 말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심화 일로의 구조적 균열들이 있다. 이 균열이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하면 민주주의는 위협을 받는다. 계층적 균열은 사회과학의 고전적인 관심사이다. 2010년대 이후 추세를 보면 소득 분배 상황이 악화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자산 측면에서는 격차가 크게 확대되었다. 지역 격차는 주로 산업구조와 부동산을 매개로 확대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제조업 구조조정의 진전은 특히 지방의 일자리 기회를 축소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산업, 일자리, 부동산 문제는 세대 간 격차를 구조화하고 있다.

지난 대선은 정치적 적대, 지역·세대 갈등에 젠더 균열까지 더해진 선거였다. 정치권은 그간의 페미니즘 공방 흐름을 정치적 쟁점으로 끌어올렸다. 젠더 균열이 정치 갈등으로 연결된 이면에는 청년층을 옥죄는 계층·지역·세대적 격차의 압박이 있다. 이 압박에서의 자유가 진전되어야 자유 시민의 애국적·공동체적 덕성도 증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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