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부(匹婦)들의 대하드라마읽음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필부(匹婦)들의 대하드라마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족보는 성서에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태복음 1장 2절)로 시작되는 예수의 족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존재한다. 아담에서부터 그 아들의 아들들로 이어져 내려오는 족보는 ‘하나님 아버지’가 인류를 구원할 ‘독생자’를 위해 계획한 ‘거룩한 계보’다. 동시에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남성중심적 기록인가를 말해주는 대표적 증거이기도 하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걸친, 한국 이민자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드라마 <파친코>(애플TV+)에도 이 신성한 계보에서 이름을 딴 인물들이 등장한다.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목사 이삭(노상현)과 아들들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목회 활동을 펼치다 재일 한국인의 비참한 현실에 눈뜬 이삭은 “우리 아이는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든다. 그의 장남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낸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노아, 차남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모세의 이름을 딴 모자수다. 이삭의 손자 솔로몬(진하)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엘리트로 자라난다. 이삭에서 솔로몬까지, 삼대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관통하는 대서사시다.

하지만 놀랍게도, <파친코>는 이 거룩한 계보에서 배제된 평범한 이름의 여성 선자를 장대한 서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선자는 이삭의 아내이자 노아와 모자수의 모친, 그리고 솔로몬의 할머니다. 흔하디흔한 그의 이름은 아내, 엄마, 할머니처럼 익명으로 취급되는 여성의 삶을 나타낸다. 실제로 선자의 삶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삭이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투옥됐을 때, “남정네들이 꿈만 좇고 있으면 밥상에 묵을 거는 누가 올리고 한겨울에 얼라들 옷은 누가 입히냐”며 생계 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선자의 삶이다. 반복되는 선자의 노동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파친코>는 그처럼 역사가 거들떠보지 않았던 삶에 초점을 맞춘, 필부(匹婦)들의 대하드라마다.

이 같은 의도는 작품 도입부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저희 어머니는 박복한 분이셨십니더.”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박복한 팔자’를 넋두리하듯 풀어놓는 양진(정인지)의 사연이야말로 여성들의 계보다. 양진의 삶도 엄마처럼 “지지리 복도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시집을 가서 아들 셋을 낳았지만 모두 돌을 넘기지 못했다. 또다시 아이가 들어서자 양진은 결국 마을의 무당을 찾아가고, 무당은 배 속의 아이가 “꼭 살아 대를 잇고 손을 이을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 선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1000억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대작의 서막치고는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어미의 절박한 기도 속에 태어난 선자도 기존의 대서사시 주인공처럼 ‘위대한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선자는 어떤 화려한 수식어도 없이 다만 “끈질기게 싸울” 아이로 설명된다. 그러나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깨닫는 순간이 온다. 평범한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지우려 했던 야만의 역사 안에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어떤 ‘역사적 업적’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찾아오는 시련에 맞서 기어이 삶을 버텨내는 선자의 생명력이야말로 이 대서사시의 가장 큰 동력이다.

극중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선자는 좌절하지 않고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선다. 이삭이 구금당한 뒤 어린 아들들을 위해 선자가 택한 생계 수단은 김치 장사였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솜씨로 김치를 담근 선자는 일본인들의 멸시 속에서도 꿋꿋이 장에 나간다. <파친코>는 그처럼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절망의 시기를 홀로 버티고 선 선자의 모습과 함께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시즌1을 마무리한다. “2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식민 지배 때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중 80만명은 일제에 의해 노동자로 끌려갔다. 대부분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약 60만명은 일본에 남아 무국적자가 됐다. 이 이야기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은 견뎌냈다.” 자막 뒤에는 노년의 선자를 닮은 재일 한국인 1세대 여성들의 인터뷰가 에필로그처럼 이어져, 다시 한번 이 작품이 “끈질기게 싸워” 버텨낸 여성들에 대한 헌사라는 점을 재확인시켰다. 요컨대 <파친코>는 여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계보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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