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리골목과 망가진 미래유산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노가리골목과 망가진 미래유산

서울 을지로3가 을지OB베어를 처음 찾은 것은 1990년대 말 이맘때였다. 실내는 소박했고 테이블은 대여섯개. 건물과 주변은 적당히 오래되었고 적당히 운치가 있었다. 실내에 빈자리가 없어 호프집과 연결된 뒤편 공터의 붉은 벽돌 담장 옆에서 별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샐러리맨도 있었고 공구골목과 인쇄골목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마다 노가리를 열심히 씹었다. 노가리는 구수했고 양념장은 독특했다. 함께 갔던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주인장께서 밤새 다듬잇돌로 노가리를 두드린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가리가 구수한 것이지요.” 주인장의 정성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실내 한구석에 노가리가 가득한 라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그날 을지OB베어를 나서며, 이 집이 오래 가길 기대했다. 우리네 멋진 노포(老鋪)가 되길 기대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주변 호프집들도 노가리 안주와 맥주를 팔았다. 입소문이 났고 사람들이 몰렸다. 언제부턴가 노가리골목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가까운 골뱅이골목과 함께 서울 도심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을지로 노가리골목은 2015년 서울미래유산이 되었다.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설명문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호프집 10여곳이 모여 있는 노가리골목은 저녁이 되면 야외 테이블까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이 몰린다. 손님이 앉으면 따로 주문이 없어도 생맥주와 노가리가 사람 수대로 나온다. 노가리골목의 원조인 ‘을지OB베어’는 1980년 당시 생맥주 체인인 OB베어 호프집으로 출발했다. 이 집을 연 강효근씨는 황해도 출신인데 그곳에서 김장에 넣어 먹던 동태의 맛을 잊지 못하다가 맥줏집을 개업하면서 노가리를 안주로 내놓았다. 초창기에는 500㏄ 한 잔에 380원, 거기에 100원짜리 안주를 더하면 5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생맥주 한 잔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10여곳’의 호프집은 거의 사라졌다. 100m 남짓한 노가리골목은 만선호프 간판으로 가득하다. 을지OB베어 옆에 생긴 만선호프는 2014년부터 주변 가게들을 하나둘 인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밀어낸 호프집이 모두 10곳. 만선호프가 모두 인수한 것이다. 이 골목에 만선호프 간판만 20개가 넘는다. 문어발식 확장이라고 해도 도를 넘어섰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도,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더니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가 있는 건물의 주인이 되었다. 노가리골목의 원조인 을지OB베어마저 접수하려고 시동을 건 것이다. 급기야 4월21일 새벽 건물주는 용역을 동원해 을지OB베어를 강제 철거했다. 정겨웠던 을지OB베어 간판은 날아갔고 입구는 금속 셔터문으로 막혔다. 우리의 추억도 산산조각이 났다. 그날 이후 이곳에선 시민단체 사람들이 모여 을지OB베어 되살리기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들은 닫힌 셔터문 위에 자그마한 안내판을 걸어 놓았다. 거기 “을지OB베어” “서울미래유산”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라는 문구(사진)가 적혀 있다. 곰돌이 얼굴도 그려져 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만선호프는 눈 하나 꿈적하지 않는다.

요즘도 해가 지면 노가리골목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런데 지금의 노가리골목엔 운치도 없고 정겨움도 없다. 그저 만선호프의 탐욕만 무성할 뿐이다. 만선호프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래서 을지OB베어가 영영 사라진다면, 노가리골목은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팥소 없는 찐빵’이라고 할까. 역사성·사회성을 모두 상실한 골목, 독점과 탐욕이 가득한 골목이 미래유산일 수는 없다.

서울시는 이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또한, 노가리골목에서 상생의 공공성이 사라졌기에 이제는 야장영업(영업장 이외의 장소에서 하는 영업)도 금지시켜야 한다. 길거리 영업이 계속된다면 그저 만선호프의 탐욕만 충족시켜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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