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축구 찬가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대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 시절, 엄마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다면 종아리 축소 수술을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 행복한 상상을 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엄마는 입을 씻었고 솔직히 나도 무서워서 그만 약속을 잊은 척해 버렸지만 여하튼 이놈의 종아리는 내 청소년기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성인이 되어 몸과 조금씩 화해를 나누며 더 이상 예전만큼 내 다리를 부끄러워하진 않게 되었지만 굳이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도 않은 그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그런데 요즘 내 다리가 좀 다르게 보인다. 가늘고 매끈함과는 거리가 먼, 태생적으로 두툼하고 근육이 잘 붙는 이 다리가 사랑스러워서 괜히 거울 앞에서 다리에 힘을 주며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본다. 요 몇 달 체육관에서 하체운동을 좀 했다고 티를 팍팍 내 주는 이 다리가 전과 달리 고마워진 것은 모두 축구 덕분이다. 우연히 시작한 동네 축구모임은 내 몸도, 생각도, 취미도 다 바꿔버렸다.

무엇보다 월요병이 없어졌다. 피곤함이 사라진 대신 모임에 늦을까봐 약간의 조바심은 생겼지만 일단 마의 월요일이 즐거워졌다.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사진을 저장해서 수시로 꺼내 보고, 어디서나 축구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늦은 밤 땀에 젖은 머리로 바람을 맞을 때의 그 상쾌함에도 중독성이 있다. 이 모든 행복은 다 축구가 가져다준 선물이다. 비록 몸에 종종 멍이 들고 어느 날은 허벅지가 아파 제대로 걷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축구가 주는 기쁨은 고통보다 훨씬 크다.

내가 패스해준 공이 동료의 발에 맞고 골로 연결될 때의 환희, 죽어라고 달려간 끝에 터치라인으로 빠질 뻔한 공을 살려내는 뿌듯함, 기본 규칙조차 몰라 종종 어리둥절했던 우리들이 제법 작전이란 걸 세우게 된 성장담까지, 이건 정말 즐거움 그 자체다. 여태 제대로 된 팀 스포츠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탓에 커다란 운동장이 주어져도 제대로 활용해본 적이 없는데, 온 그라운드를 누빈 첫 경험은 가빠오는 숨만큼이나 벅차오르게 행복하다.

‘축알못’ 그 자체였던 내가 축구 때문에 신발을 새로 사고, 축구 덕분에 내 몸을 더 사랑하게 되기까지 많은 공로자들이 있었음을 안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알려준 <골때리는 그녀들>의 큰언니들, 여자축구의 매력을 맛깔나는 글로 전파해온 김혼비 작가, 진작부터 축구의 매력에 빠져 클래스를 열고 여자 동호인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어온 이들이 여기저기 튼튼한 돌을 놓아두었기에 나도 이 돌을 딛고 어설프게나마 축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멋진 여자들을 홀린 듯 따라 하다보니 어느새 감사하게도 나도 신세계에 들어선 셈이다.

물론 제일 고마운 분들은 우리 멤버들이다. 일하다 공부하다 아이들을 챙기다 그 바쁜 와중에도 함께 공을 차기 위해 꼬박꼬박 모임에 나오는 이 멋진 여자들에게 어떻게 감사인사를 해야 할까. 나에게 다른 취미를 선물해주어서, 내 몸과 다르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함께 몸을 구르며 쌓는 우정을 오랜만에 경험하게 해주어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다치지 말고 지금처럼 재미있게 오래오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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