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 하지마. 다른 외계인에게 투표했으니까읽음

이명희 사회에디터

대다수 국민이 울며 겨자 먹기로 대통령선거를 치렀는데 숨 돌릴 새도 없이 우리에게 다시 선택지가 주어졌다. 당장 27~28일 6·1 지방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되고 본 투표는 일주일도 채 안 남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번에도 ‘덜 악한 놈을 찍어야 하나’.

이명희 사회에디터

이명희 사회에디터

지난 대선에서 절반의 국민은 ‘정권교체’를 선택했다. 처지가 뒤바뀐 양당은 이번 지방선거를 ‘대선의 연장전’으로 보고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의 유권자가 자신들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새 잊었나 보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점은 정권교체에 동의했든, 동의하지 않았든 윤석열 정부가 그리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직 가늠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답정너’ 문제 반복 풀이의 상황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선 약 3개월 만에 또 투표를 해야 하는 유권자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한숨만 나온다. 더욱이 대선 직후 치르는 지방선거 일정상 그 어느 때보다 거대 양당이 아닌 제3의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문제를 반복해서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덕후까진 아니지만 좋아하는 미국 만화영화 <심슨 가족>(The Simpsons)에 지금의 정치 현실과 기가 막히게 비슷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96년 방영된 한 에피소드에는 지구 정복을 위해 대통령 후보로 위장한 외계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외계인 자매 캉과 코도스는 당시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대통령 후보 빌 클린턴과 밥 돌을 납치한 후 두 사람을 복제해 선거에 나간다. 실체가 들통났는데도 이들은 적반하장이다. “그래 맞아 우린 외계인이야. 그런데 니들이 뭘 어쩌겠어? 여긴 양당제잖아?” “너희는 좋든 싫든 우리 둘 중 하나를 뽑아야 해.” 한 유권자가 “흠, 난 제3당에 투표할 거야”라고 하자 외계인들은 “그러시든가… 네 표가 종잇조각이 되어도 상관없다면”이라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캉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미국 국민들은 노예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호머의 아내 마지가 신세를 한탄하자 그가 건네는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다. “내 탓 하지마. 난 코도스를 뽑았다고.” ‘양당제의 결말’을 꿰뚫는 에피소드 아닌가. 유권자들이 둘 중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외계인의 세상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다시 우리 얘기로 돌아오자. 이번 지방선거 역시 양대 정당 위주의 경쟁이 되풀이되고 있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난 수십년간 지방선거는 늘 그랬다. 그렇다고 결과가 뻔히 예상된다고, 심슨 가족이 풍자한 대로 “누구를 찍더라도 똑같다”고 지레 포기할 수도 없다.

유권자의 한 표에 ‘사표’는 없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17개 광역단체장과 교육감, 구청장(군수) 등 도장을 7번 찍어야 한다. 나는 서울시장 후보 정도를 제외하면, 솔직히 동네에 누가 출마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럼 나머지 후보들은?

그나마 우리가 후보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선거 공보물이다. 주 초반 집으로 온 선거 공보물을 뜯었다. 돌이켜보면 여태껏 공보물을 찬찬히 읽은 기억이 없다. 고백하건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내다버리곤 했었다. 두툼한 봉투에서 공보물을 꺼내려는데 메모지 크기의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기호 5번 다윗이 골리앗을 이깁니다. 김광종 서울시장 후보(무소속).’ 공보물도 정당이나 후보별 ‘부익부 빈익빈’ 양상은 뚜렷했다. 주머니가 두둑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 후보들의 공보물은 나름 괜찮았다. 법이 허용한 분량을 꽉 채웠다. 그러나 소수 정당 등은 그 절반, 심지어 단 한쪽만 만들기도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책·공약마당(policy.nec.go.kr)’에 들어가도 후보별 공약을 볼 수 있다.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은 지방선거보다는 대선에 어울리는 이슈가 대부분이다. 다들 안다. 공수만 바뀐 여야 후보들은 도긴개긴이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재벌 회장 걱정이라던데 추가하자면 정치인도 들어간다. 새 정부가 국정 동력을 확보하지 못할까, 야당이 정부를 견제할 힘을 잃을까 걱정이다. 그러다 보니 후보들은 ‘너희들이 찍지 않고 별수 있겠느냐’며 배짱을 부린다. 그렇게 선거는 끝나곤 했다.

이제까지는 그랬더라도 6월1일엔 걱정은 접어두자. 각자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니 어느 후보를 찍었다고 서로 탓할 것도 없다. 유권자의 한 표에 ‘사표’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광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다양성의 정치가 필요하다’며 ‘무지개 연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진화한다. 나는 이번만은 정당을 기준 삼는 ‘묻지 마’ 투표를 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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