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언제나 어둠이므로읽음

인아영 문학평론가

“지금 나는 앵꼬/ 사랑에 대해 말할 기운 없다”(‘번아웃’)고 말하는 시집을 읽었다. 권민경의 두 번째 시집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민음사, 2022). 힘도 기운도 에너지도 없는 나날이 있다. 무언가를 채워넣지 않으면 생활도 사랑도 일도 가동할 수가 없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나날. 그렇다고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고 자신의 주변을 맴돌면서 자꾸 무너지는 나날. ‘앵꼬’가 난 것은 단지 우울한 기분 때문만은 아니다. 권민경의 이 시집은 인간이란 애초에 얼마나 쉽게 병들고 자주 고통스럽고 금시에 늙고 갑자기 없어지는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잔인한 사실 앞에 쓰러져 청승 떨거나 자기연민에 빠진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심정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어떤 시는 다짜고짜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프네?”(‘철원’)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아프네? 그래, 아프다. 하지만 몸이든 마음이든 척추든 내장이든 어딘가가 아프다고 해도, 늙고 병든 몸으로 논바닥을 뒹굴며 이 땅에서 놓아달라고 아무리 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도 이 시집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고통은 자부도 배움도 아니고 그저 육신에 지겹도록 붙어 있는 조건이다. “고통, 지금의 날 만든/ 고통? 싫어하는/ 말// 굴곡 없이 살고 싶었다/ 하는 일에 막힘이 없고 콧방울이 복되고 미간이 깨끗/ 푸르고 어쩌고저쩌고/ 쳇”(‘사단법인 취업 지침’) 굴곡 없이 살고, 하는 일에 막힘이 없고, 콧방울도 복되고, 미간도 깨끗하면 참으로 좋겠지. 하지만 그런 경지는 누군에겐들 가능하겠나. 아니, 혹시 누군가에게는 가능한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꿈을 꾸다 소스라치는데/ 이 밤/ 나 말고 많은 사람들/ 울고 있겠지/ 동물까지 포함하고 싶어서/ 미끄러지네 저 네발짐승 대리석 바닥을 허겁지겁 뛰어가// 삶은 고난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했지?/ 그런 너에게서 고통을 느낄 수 없었어/ 부러워서 고통스럽다”(‘철원’) 혼자 아프고 외로운 밤, 그래서인지 검은 점과 회색 점이 깜박깜박 보이는 것 같은 밤, 가슴이 미어지는 꿈에서 소스라치듯 깨어나 우는 밤, 그러면서 나 말고도 또 우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한 밤. 나 같은 사람을 찾고 싶어서, 하지만 왠지 쉽게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울고 있는 네발짐승을 찾아 미끄러지면서, 나처럼 고통받는 존재에 눈길을 돌린다. “네가 고통스러웠다는 건 네 고백을 통해 안다./ 내가 고통스러웠다는 것도 늘 고백하지만/ 구질해서 그만하려는데 잘 안 돼.// (…) 태양 같은 사람이 좋다지만 나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는 원인.”(‘동병쌍년’)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은 우리의 취약함을 누구와 함께 나누느냐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우리의 존재를 보강하고 키워주어서 행복을 함께 누리는 대상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장 연약하고 얇고 부서지고 구겨져 있는 순간에,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나날에, 누구의 곁에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삶은 고난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사람에게도, 드라마 리뷰에 ‘발암’이라는 댓글을 스스럼없이 쓰는 사람에게도, 인생에서 그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며 그런 순간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많은 것을 휩쓸어가고 뒤집고 바꾸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권민경의 시에 기대어 ‘구질’하게 고백하자면, 요즘 나도 앵꼬. 사랑에 대해 말할 기운 없다. 그러나 권민경의 시에 기대어 다시 말해보자면, “이제 언제나 어둠이므로 밤이 무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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