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 예춘호

이일영 한신대 교수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는 시기다. 20대 대선은 상대 진영에 대한 적개심을 결집해 이루어진 선거였고, 뒤이은 6·1 지방선거는 대선 연장전으로 치러졌다. 지금의 행태로 보면, 정치권은 향후 산업·노동·지역의 재편에 대해 정치적 분열을 격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되면, 민주주의의 위기는 본격화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이일영 한신대 교수

이일영 한신대 교수

현실이 캄캄할 때,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 전통을 돌아보게 된다. ‘원칙 있는’ 민주주의자였던 고 예춘호 선생(1927~2020)이 지금 불빛이 될 수 있겠다. 예춘호는 5·16 쿠데타 이후 결성된 민주공화당의 30대의 촉망받는 사무총장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하고 유신체제에 저항운동을 벌인 정치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짙어지는 현시점에서 보면, 예춘호야말로 공화국의 분열에 맞서는 진정한 민주주의자였음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연구에서, 정상호 교수는 예춘호를 근대 정당정치의 실험가, 통합과 포용의 1세대 정치인, 미래지향형 혁신가의 요소를 지닌 ‘민주적 근대주의자’로 평가했다. 이기호 교수는 재야운동을 통한 민주화, 새로운 정치세력에 의한 정치발전을 시도한 예춘호의 ‘재야의 정치’에 주목했다(<동향과 전망> 115호). 필자는 이러한 평가들에 공감하면서, 그를 ‘생활정치’를 위한 공동체 형성에 주력한, 공화적 민주주의자로 기억하고 싶다. 그는 지역·재야·청년의 커먼스 기반을 중시했고,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방안을 모색했다.

예춘호는 청년 시절 일본 유학을 하면서 진보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예춘호는 해방 이후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에 거리를 두고 사회사업·교육사업을 중심으로 지역활동을 펼쳤다. 그가 정치인이 되기 전에 가장 열정을 쏟았던 사업은 난민주택을 짓는 대규모 지역개발 사업이었다.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는 공부할 여건이 못 되는 학생들을 위해 고향에 도서관과 고등공민학교를 세웠다. 돈이 없어 결혼식을 늦춘 이들을 위해서 무료 예식장을,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집을 설치했다.

예춘호는 ‘재야의 정치’를 행한 인물이다. 1970~1980년대 한국의 재야는 대학과 종교를 바탕으로 형성된 네트워크를 작동시켜 제도권 밖에서 국가권력과 대항할 만큼의 새로운 정치를 형성할 수 있었다. 예춘호는 현실 정치에서 재야 운동으로 이전한 드문 사례이다. 재야를 현실 정치에 활용한 정치인은 여럿 있지만, 재야의 정치를 현실의 정치력으로 만드는 데 헌신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는 재야 운동과 정치 운동을 연결하여 국민적 에너지를 모아낼 수 있는 정치적 운동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김부겸 전 총리의 증언).

예춘호는 특히 청년 공동체를 정치의 근간으로 중시했다. 그가 정치인으로 투신하기 전, 그리고 정치인에서 은퇴한 후에 생활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 청년들과의 공동체이다. 그는 정치인이 되기 전 지역활동을 하면서 각 대학 학생회장 출신들로 구성된 ‘사회문제연구소’ 활동을 하며 공부모임을 함께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문제연구소는 진보적인 청년들이 참여했으며, 4·19와 5·16을 거치면서 청년문제연구소로 개편되어 공화당 인맥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예춘호는 1987년 6월항쟁 후 양김의 후보단일화 노선을 견지했으나 실패했고, 민주화 세력은 대선 패배 후 양김을 따라 분열했다. 그는 분열적 지역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야권통합 운동에 나섰으나 실패하자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깨끗하게 은퇴했다. 정계 은퇴 후 예춘호는 청년 활동가와 지식인들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전념을 기울였다. 그는 ‘한겨레사회연구소’(후에 한국사회과학연구소로 통합)를 설립하여 현실분석과 정책입안, 정치와 운동의 연결을 모색했다. 예춘호는 계층·지역·세대의 조화를 실천한 정치인이었다. 그의 실천이 현실 정치인으로서 성공보다 실패의 기록에 더 가깝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를 분열시켜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이익을 얻는 이들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공화·공존의 기반을 만드는 정치모델을 추구한 민주주의자였다.

필자는 그의 연구소 운영을 20여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작고하기 전, 조촐한 생신 기념 자리가 있었다. 곁에 있다가 그가 탄식하며 눈물짓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그때 좀 굽혔으면 이 좋은 사람들이 뜻을 펼칠 수 있었을까….” 그는 끝까지 청년들의 동지였고, 자신의 원칙을 점검하는 민주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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