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쉴, 권리가 되려면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단식투쟁을 마치고 쉬는 중이다. 때 되면 먹고, 낮에는 걷고 밤에는 잔다. 휴가제도라면 남부럽지 않았는데, 이렇게 잘 쉬는 기분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일상을 거들어주는 누군가가 있고, 주위 모두가 회복을 응원한다는 점이 쉼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쉬고 나면 복귀할 자리가 있고 쉬는 동안 소득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은 쉼의 시작일 뿐이었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아프면 쉴 권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며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시민사회가 1995년부터 과제로 제시한 상병수당이 2020년 7월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에 포함되었고 오는 7월 시범사업을 앞두고 있다. 상병수당은 일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다쳐서 쉬어야 할 때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감염병의 속성상 ‘아픈 사람이 쉬어야 나/우리가 안전하다’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쉬게 하려면 급여를 지원해야 한다는 자명한 결론에 닿았다. 그러나 감각의 절반은 감염인 격리 필요에서 나오기도 했으므로 저절로 권리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보건복지부는 ‘아프면 쉴 권리’의 중요성을 “증상이 있음에도 쉬지 못하고 출근해 집단감염으로 확산된 사례”로 설명한다. 아파도 출근해야 했던 그 노동자에게는 무슨 사정이 있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시범사업 급여 수준이 최저임금의 60%인 것도 그 노동자의 사정을 모른 탓이다. 서울형 유급병가는 하루 8만5610원(2021년), 가족돌봄휴가도 5만원인데, 상병수당은 4만3960원이다. 입원으로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쉼을 선택하기 쉽지 않다. 아파도 출근하는 비율이 높은 영세자영업자의 사정에도 맞지 않다. 고용 불안도 중요하다. 회복 후 돌아갈 자리가 있어야 하고 복귀 후 차별이나 괴롭힘도 없어야 한다. 이런 취지의 병가제도가 한국은 없다.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이 복지 차원에서 운영할 뿐이다. 그나마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용률에 4배 이상 차이가 난다. 병가가 없으면 연차휴가를 쓰기도 하는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그마저도 없다.

특수고용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초단시간 노동자들은 제도 설계가 어렵기도 하다. ‘아파서 쉬겠다’는 말을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말 못하고 일을 놓거나 앓으며 일한다.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은 개인의 몫이 된다. 모든 일하는 사람이 ‘아프면 쉴 권리’를 누리려면 상병수당과 함께 준비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 아프면 쉬라는데, 쉬어야 덜 아프다는 진실도 놓쳐서는 안 된다. 세계 순위권을 놓치지 않는 장시간 노동, 인색한 휴가제도, 아픈 걸 무능으로 여기는 문화 등은 아픔도 쉼도 공론장에 등장하기 어렵게 만든다.

노동시간과 휴식에 관한 공론장은 늘 ‘생산성’ 우려에 압도당해 왔다. 가뜩이나 경제가 불안정한 시기라 쉼을 논의하는 게 더 한가롭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상병수당 도입 계기였던 코로나19를 복기해보자. 감염병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신종 감염병이 반복되는 배경에 성장에만 골몰하는 체제가 있었다. 생산성을 위해서라면 자본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착취하든 길을 열어주었다. 그 결과가 차곡차곡 쌓여 기후위기로, 신종감염병으로, 불평등으로, 경제위기로 삶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쉴 권리를 세워야 할 때다. 쉼은 능력 있고 근면한 이들의 전리품이어야 하는가, 역량을 북돋고 서로를 돌보는 출발선이어야 하는가. 아픔과 아프지 않음, 일과 쉼 사이의 경계는 그리 뚜렷하지 않다. ‘아프면 쉴 권리’는 노동과 쉼과 아픔의 의미를 되물으며 세계를 다시 쓰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상병수당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시범사업을 하는 종로, 부천, 천안, 순천, 포항, 창원에 거주하는 분들이 잘 쉬거나 못 쉰 경험을 풍성하게 나눠주길 기대해본다. 모두 귀 쫑긋하며 함께 잘 쉴 궁리를 시작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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