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을 덮고 사전을 펼 때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영화 <행복한 사전>의 한 장면.

영화 <행복한 사전>의 한 장면.

장풍은 손바닥으로 바람을 일으켜 근거리의 상대를 타격하는 초능력이다. 장풍은 무협지에 등장하는 대표적 허풍이다. 반면 실제로 신체적 접촉 없이 상대에 위해를 가할 수도, 이해를 구할 수도 있는 초능력이 있다. 인간의 말이다. 세 치 혀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 않는가.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언어를 매개로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초능력이 발휘되려면 합의된 말의 뜻을 공유해야 한다. 존재하는 단어를 다 알 수 없음은 물론이고 잘못 알고 오용하는 단어도 적지 않다. 명확하게 말을 다루는 일은 만만치 않다. 사전이 필요한 이유다.

사전 편찬은 시간과 품은 많이 들지만 이득은 적어 적임자를 찾기 어렵다. ‘비범한 사람이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사전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도 광기 어린 두 남자의 집념의 산물로 71년 만에 완성되었다. <대일본국어사전>도 마쓰이 간지 혼자서 20년간 매일 33단어를 작업한 지독한 끈기의 결과였다.

영화 <행복한 사전>은 국어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 속 사람들은, 사전은 언어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배와 같다는 신념으로 채집한 단어에 뜻을 달고 용례로 풀어 15년 만에 사전을 발간한다. 사전을 만들기 시작한 청년은 어느새 중년이 돼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사전을 어루만진다.

원작 소설 <배를 엮다>의 작가는 일본 국어사전을 대표하는 <신메이카이 국어사전>과 <산세이도 국어사전>의 편찬자를 모델로 극화한 것 같다. 특히 일반적 뜻풀이에서 벗어나 정곡을 찌르는 정의와 독특한 용례로 사전의 용도를 ‘찾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바꾼 야마다 다다오의 그림자가 짙다.

야마다 다다오의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에서 ‘연애’를 찾으면 ‘특정한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둘만이 함께 있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합체하고 싶은 생각을 갖지만 평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척 마음이 괴로운 (또는 가끔 이루어져 환희하는) 상태’라고 뜻풀이 되어 있다. 파격이다. 곱씹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진다. 앰브로스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처럼 냉소적, 풍자적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의 액면뿐 아니라 이면의 의미를 함께 전달하려는 의도다.

말 같지 않은 말이 횡행한다. 오염된 언어로 말문이 막힌다. 인도의 한 여성이 자신과 결혼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독신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어찌 결혼으로 표현되는지 의아했다. 시적 허용인가. 둥근 사각형이 잘못된 말임을 알면서 버젓이 ‘민주주의 독재’에 이어 ‘검찰 공화국’이란 형용모순적인 표현이 걸러지지 않고 유포된다.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의미를 모른다면 말하기 전에 사전 한번 들쳐보는 성의를 가지면 좋으련만 성마른 비판 의식만 앞선다.

대통령실에서 발표한 윤석열 대통령 행보에 대한 홍보문을 보면 더 답답하다. 대통령의 상시적 도어스테핑이 총 12회라고 자찬한다. 생소한 용어라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뒤졌다. ‘그는 언론에 도어스테핑 당한 것에 대해 불평했다’는 대표 용례만 보더라도 다분히 부정적 의미였다. 굳이 도어스테핑이란 용어를 쓴 기자의 영문 페티시도 저렴한 취향이지만 문제는 취재 대상에게 더 부정적인 영문 용어를 대통령실에서 자랑하고 있는 현실이다.

윤 대통령께서도 이제 법전과 콘사이스는 잠시 덮으시고 국어사전을 애용하신다면 메모리얼보다 추모라는 말이 결코 촌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게 될 것이다. 중국인들은 사전을 옥편이라 불렀다. 제대로 된 말은 구슬과 같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름답고 정확한 한국말로 국민과 소통하는 보배로운 지도자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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