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말’에 대하여

조홍민 사회에디터

일본의 정치인 아소 다로(麻生太郞)는 ‘실언 제조기’로 유명하다. 총리 시절인 2009년 총선을 앞두고 젊은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소득이 적으면 가정을 꾸려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많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오자 “돈 없으면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가 빈축을 샀다. 한번은 의사들의 지방근무 회피 현상에 대해 “(의사들 중에는) 사회적 상식이 꽤 결핍된 사람들이 많다”고 해 자민당 지지기반인 의사단체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저출생·고령화는) 아이를 안 낳는 쪽이 문제” “지구온난화 덕에 홋카이도 쌀이 맛있어졌다”는 등 아소의 막말은 잊을 만하면 등장했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조홍민 사회에디터

정치인과 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소통과 설득 없이는 정치행위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말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인식,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그래서 발언을 할 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소처럼 툭하면 실언을 내뱉는 정치인은 자신의 이미지뿐 아니라 소속 당의 표를 깎아먹는다. ‘여염의 포의(布衣)’가 하는 말과 정치인의 언어가 갖는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언변이 뛰어난 대표적 정치인으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엄청난 독서량과 철저한 자기 노력을 통해 축적한 지식과 사고의 방대함은 김 전 대통령 언어의 바탕이 됐다.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고 진솔함이 담겼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치열한 고민과 사색이 뒷받침됐고, 늘 메모하며 준비했다. 김 전 대통령의 어록 중에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란 말이 있다. ‘무엇이 옳으냐,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원칙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판단하되, 이를 실천할 때는 장사하는 사람이 돈벌이를 하는 데 지혜를 발휘하듯 능숙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짧은 단어 몇 개로 인생의 성공을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을 적확하게 짚은 경구다.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인 최경환 전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김 전 대통령의 말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언어 선택의 마술사와 같았다. 핵심을 꿰뚫고 대중의 머릿속에 쉽게 각인될 수 있는 조어를 제시하는 능력이 있었다. ‘행동하는 양심’ ‘햇볕정책’ ‘철의 실크로드’ ‘망원경같이 멀리 넓게 보고, 현미경처럼 좁고 깊게 보라’ 등 모두 김 대통령이 만든 말들이다.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국민들이 들었을 때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연상되게 하는 말들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말과 관련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참여정부 대변인을 지낸 윤태영은 저서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달변이라는 별칭이 ‘거듭된 말실수’라는 지적과 공존했지만 “아주 특별히 말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윤태영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발언을 할 때 문제의 핵심이나 본질을 회피하지 않았다.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쉬운 언어를 썼지만 논리정연했고, 말솜씨보다는 ‘낮고 열린 자세’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모름지기 국가 지도자라면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 대통령의 말이 화제다. 취임 한 달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출근길 소통’(도어스테핑)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투박하긴 하지만 취재진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장면이 나름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취임 이후 약 20차례나 기자들의 질문에 직접 답했다. 여태껏 접해보지 못했던 형식은 물론 경청할 만한 답변도 눈에 띈다.

반면 윤 대통령의 직설적 화법이 우려를 자아내는 측면도 적지 않다.

검찰 출신 편중 인사에 비판이 나오자 “과거엔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출신들이 도배를 하지 않았느냐”고 하는가 하면 배우자 김건희 여사 관련 논란이 불거진 데 대해선 “제가 대통령은 처음이라… 어떻게 방법을 좀 알려주시라”고 거침없이 답해 듣는 이들을 아연케 했다.

대통령의 언어가 갖는 상징성과 파급력을 감안하면 툭툭 내뱉는 한마디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숙고를 거치지 않은 발언, 정제되지 못한 메시지가 낳을 파장을 고려해야 한다. 한두 번은 말실수로 치부할 수 있지만 여러 차례 되풀이되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 말 한마디에 공들여 쌓아온 커리어가 ‘한 방에 훅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통령의 레토릭이 늘 ‘사이다 발언’만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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