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 시사회

조광희 변호사

문화 발전 뒤안길엔 그늘도 있다
애쓰지 않으면 언젠가 뒤처질지도

이룬 건 수용하고 폐해 고쳐 가면
예술과 문화는 국적마저 넘어서
넓은 인간성의 바다로 흘러갈 것

코로나 기간 동안 많은 영화가 개봉을 미루었다. 이미 제작을 마친 영화만으로도 앞으로 1년은 거뜬히 영화가 공급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는 기록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천만 관객’이 어렵지 않게 돌파되었고, 지난달에 있었던 칸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들이 또 각광을 받았다. 이제 한국의 문화적 저력은 한국인에게나 외국인에게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직 코로나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거리를 나서면 사람들의 활기가 오롯이 느껴진다.

조광희 변호사

조광희 변호사

칸영화제에서 송강호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브로커>는 6월 초에 개봉했고,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헤어질 결심>은 곧 개봉한다. 코로나가 움츠러들자 시사회들도 예전처럼 열렸다. <브로커>는 내가 소속된 법무법인이 법률자문을 했으므로 초대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헤어질 결심>은 초대받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제작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외출했다. 시사회장에 조금 일찍 도착하여 서성거리는데, 평소 왕래가 있는 오광록 배우가 나타났다. 오 배우에게 이끌려 엉겁결에 따라가니, 관계자들의 대기실이다. 안쪽에서 박찬욱 감독이 무대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전설적인 감독이라 아는 척하는 것도 죄송했지만, 예전의 인연을 핑계로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는데,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먼저 말을 건네서 내 허영심을 채워주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탕웨이 배우가 눈에 보였다. 탕웨이는 10년 전에 내게 “워 아이 니(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사이기에 아는 척을 할까 하다가, 대기실에서 쫓겨날까봐 자중했다. 탕웨이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코웃음을 치는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박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 <헤어질 결심>이 모든 관객이 찬성할 영화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감독 자신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여전히 빛나면서도, 잔인함은 줄이고 유머는 늘렸기에, 박 감독의 영화 중에서 특히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인 건 분명하다. 탕웨이는 아름다움에서나 연기에서나 돋보였고, 박해일 배우는 전에 선보이지 않았던 연기를 시도하고 마침내 성취한다. 친숙함과 낯섦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형식으로 ‘미스터리 수사극’과 ‘사랑의 광시곡’을 결합한 박 감독에게 칸이 감독상을 주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시사회를 마치고 용산역 앞으로 나왔는데, 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다가온다. 버스를 타고 멀지 않은 집으로 가는 짧은 사이에 20년 전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세상의 변방이라며 겸손했던 한국에서 막 부흥하기 시작한 영화의 열정이 분출하던 나날들. 저물지 않던 영화제의 밤과 끝나지 않던 토론 그리고 정부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영화를 지키려 싸우던 용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영화를 비롯한 한국 문화의 경이로운 발전은 그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전해지는 즐거운 소식에 취하기만 하면 될 일인지는 모르겠다. 이 공동체에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쌓여 있다. 발전하는 문화의 뒤안길에는 BTS도 쉬어가야 하는 불합리와 중노동의 그림자도 있다. 부단히 애쓰지 않으면 언젠가 과거의 영광을 곱씹으며 뒤처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른바 ‘국뽕’에 취할 필요도 없지만, 성취를 폄하할 필요도 없다. 이룬 것은 받아들이고 폐해는 고쳐 나가면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예술과 문화는 국적마저 넘어서며 저 넓은 인간성의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어쨌거나 동시대의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이렇게라도 마주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행복한 일인 건 틀림없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의 마지막 해인 2009년의 일기에 적은 이 단순한 문장을 좋아한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참으로 그러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들이다

(탕웨이 배우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고 칼럼을 마치면 사람들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기에 사연을 밝힌다. 남편인 김태용 감독이 연출하고 탕웨이가 출연한 영화 <만추>의 개봉이 10년 전에 있었다. 그 시사회 뒤풀이에서 누군가 나를 “법적 분쟁 때문에 개봉하지 못하던 <만추>를 개봉하게 해준 변호사입니다”라고 소개하자, 탕웨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워 아이 니.” 여기서 전후맥락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과 단어의 선택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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