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고, 믿음직한 품위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고독하고, 믿음직한 품위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사진)의 영어 제목은 ‘Decision to leave’이다. 영어 제목을 먼저 봤다면 아마도 대부분 ‘떠날 결심’이라고 번역할 듯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헤어지다’는 맺은 관계를 끊고 따로 갈라서는 것을 뜻한다. ‘결심’은 어떻게 하기로 자신의 뜻을 확실히 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떠나다’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을까? 떠나는 것은 벗어나서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이란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왜 헤어질 결심이 떠날 결심으로 영역되었는지 알게 된다. 관계를 끊고 갈라서려고 했지만 결국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게 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다가서는 하나의 열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또 다른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악이다. <헤어질 결심>에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두 개의 곡이 등장한다. 하나는 정훈희의 ‘안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구스타프 말러의 ‘심포니 5번 4악장’이다. 정훈희의 ‘안개’는 김수용 감독의 1967년 영화 <안개>의 영화음악으로 작곡되었다. 한국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로 불리기도 했던 김수용 감독의 이 작품은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인 윤희중은 무진의 햇볕과 공기, 해풍에 섞인 소금기를 합성한다면 훌륭한 수면제를 만들 수 있으리라 말한다. <헤어질 결심>의 남자 주인공 해준은 불면증에 시달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준은 부족한 햇볕 때문에 더 심각한 불면에 시달린다. 안개는 그의 불면을 더 깊게 한다.

말러의 교향곡 5번에는 매 악장 제시어가 있다. <헤어질 결심>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 쓰인 4악장 아다지에토에는 ‘Sehr langsam’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독일어로 매우 느리게를 뜻한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고, 잉크가 물에 떨어지듯 서서히 퍼지는 사람이 있다는 해준의 대사를 생각해 보자면 영화가 말하고 싶은 슬픔은 그렇게 잉크처럼 천천히, 매우 느리게 퍼지는 슬픔이다. 그건 사랑의 방식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관찰되고 기록되는 게 아니라 영원히 기억되는 방식은 휘몰아친다기보다 젖어드니 말이다.

로맨틱하면서 절절한 이 악장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1971년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주제곡으로 쓰인 바 있다. 이 영화는 토마스 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가였던 주인공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는 영화에서 작곡가로 설정이 바뀌어 있다. 요양차 베니스에 들른 그는 우연히 미소년 타치오를 발견하고 소년에게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경험한다. 그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예술가는 콜레라가 창궐하는 베니스를 떠나지 못하고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떠나지 않으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차마 떠나지 못한다.

“고독하고 말 없는 사람이 관찰한 사건들은 사교적인 사람의 그것들보다 더 모호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더 집요한 데가 있다”고 아센바흐는 말한다. 토마스 만은 평생 평범한 시민의 삶과 고독한 예술가의 삶 사이를 고민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말처럼 평범한 시민들은 사교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런 시민의 말 너머의 고독하고 말 없는 세계를 추구한다. 예술 영화라고 부르는, 작가주의 영화가 까다롭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투적인 시민의 말보다는 고독하고 말 없는 사람이 관찰한 세계를 주목하고 표현하니 말이다.

칸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브로커>에 실망한 사람들이 꽤 있는 이유도 무관하지 않다. <브로커>는 기대 이상으로 사교적이다. 반면 <헤어질 결심>은 우리의 일상을 잠시 잊게 해준다. 모호하고 집요한 작가의 관심으로 일상에 균열을 내는 순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가령 송서래, 탕웨이의 집 벽을 장식하는 벽지 무늬처럼, 그녀가 돌발적 맥락에 사용하는 ‘부족’ ‘중단’ ‘품위’와 같은 지나치게 정확한 한국어 단어 사용법처럼 말이다.

<무진기행>의 희중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편지를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라고 묻자 인숙은 “아마 선생님처럼 외로운 사람이었겠죠”라고 대답한다. 희중은 인숙에게 헤어질 결심을 하며 편지를 쓴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는 스마트 워치, 스마트폰에 음성을 남긴다. 수기로 남겼던 취재록이나 기록물은 음성형태의 디지털 지문으로 저장된다. 누구나 스마트 워치나 스마트폰을 쓰지만 영화를 통해 그것은 매우 특별한 소도구가 된다. 그런게 바로 예술가의 시선일 테다. 천박한 사교적 찬사가 뉴스를 대신하는 즈음, 고독하고 모호하지만 집요한 관찰이 더욱 절실하다.


Today`s HOT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교내에 시위 텐트 친 컬럼비아대학 학생들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황폐해진 칸 유니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